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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수필) 내가 왕년에는... _ 灘川 이종학<소설가, 에드먼튼>
 
프랑스 정신의 아버지이며 삶의 철학자인 몽테뉴의 저서를 두 번 읽고 나서부터 나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동서양의 고전 읽기에 빠졌다. 2, 30대의 열기가 늙은 나이에 다시 살아났음인가? 이런 독서 편향 탓인지 내 입에서 ’내가 왕년에는……‘이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자주 나온다. 우선 우리 아이들이 고개를 돌린다. 거기다가 ’내가 어렸을 적에는……‘ 하고 거슬러 올라가면 금세라도 벌떡 일어날 기세를 보인다.
그동안 변변치 못한 지난 날임에도 용감하게 입으로, 글로 여과 없이 우려먹은 과거 타령이다 보니 더는 듣기 민망하리라. 지난 생애를 과거완료형으로 늘어놓는 빈도는 나이와 정비례하는 것 같다. 그래서 틀딱거리는 입에서 쉰내 난다는 흉을 곧잘 듣기 마련이다.

어느 날인가 아내가 넌지시 그러나 따끔하게 책망하는 바람에 찔끔했다. “당신 정말 늙었구려. 전에는 안 그러더니 걸핏하면 자기 자랑이나 늘어놓고!” 아, 그래서 그랬구나! 아이들이 고개를 돌린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었으니 다른 사람들은 어땠을까! 영혼 없는 자랑을 늘어놓다니 송아지가 다 웃을 노릇이다. 내 자존감의 큰 손상이다.
‘내가 젊었을 적에는……’ 하면서 나도 모르게 자찬(自讚)의 도구로 삼으려 했다면 그것은 바로 앞으로 가는 힘이 소진되었음을 자인하는 증좌이다. 의욕적인 오늘은 한낱 꿈에 불과하다. 그러니 부끄럽지 않을 내일을 어찌 입에 올리랴. 세월이 흐르면서 자기 좋은 대로 변하는 기억에 그나마 의지하려는 몰골이 처량하다.
속도가 신이 되어버린 시대에 살면서 늙으면 왜 지난 날을 버릇처럼 들먹이면서 말이 많아지는가를 생각해 봤다. 그냥 넘겨 버리기에는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 나를 과거의 나로 생각한다거나 낡은 시간에 연연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인생 종착역에 가까워질수록 지난 날이 그리워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나 같이 조국을 떠난 이민자의 외로움과 좌절은 바로 과거로의 회항과 직결된다. 그렇다고 내 과거를 거론하고 싶어진다는 이유로 삼기에는 괴변에 불과하다.
과거는 아무리 거창하고 화려해도 미망(迷妄)의 벽을 넘지 못한다. 그림자로는 칼날을 만들 수 없듯이 과거가 현재나 미래를 온전히 장식하거나 지배할 수 없다. 어느 정도의 밑거름은 될 수 있을망정 큰 성취를 추구하는 파워로는 미약하다. 아니, 그런 파워가 직접 크게 작용해도 오히려 혼란을 일으킨다. 어제 무엇을 했다는 사람 부럽지 않다는 옛말이 있다.

나는 캐나다 이민 초기에 한국에서의 내 신상을 궁금해하는 얼굴들을 대하고 당황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이국에서 교민을 만나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고향에 온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내 내 신상(身上)털기에 직면하자 곤혹스러웠다. “한국에서는 무엇을 했느냐?”, “고향이 어디며, 어느 학교 출신이냐?” 궁금한 게 한둘이 아니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지는 귓속말에 바짝 긴장했다. “아무개는 한국에서 무엇을 했다더라.”
물론 한국인이 자랑하는 정(情)의 한 표현임을 모르는 건 아니다. 우리는 서로의 집안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를 알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는 자랑을 주고받는다. 이웃끼리 기탄없이 정감을 나누는 교류가 얼마나 따뜻한가. 옛날 부족사회에서는 이런 정 나누기는 바로 공감과 공존, 단합의 원동력이었다. 부족 생존의 문제였기에 <우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심지어 ‘우리 마누라’라고 한다.

지금은 다르다. 각기 생활의 범위가 넓어지고 하는 일이 다양해지면서 사생활 개념인 프라이버시의 보호가 필요해졌다. 특별한 사이가 아니고는 남에 대해서 미주알고주알 알고 자시고 할 까닭이 없다. 서로의 경계가 지나치게 허물어지면 오히려 정으로 위장된 간섭이나 염탐이 되어 불쾌하다. 그로 인해서 정이 독으로 이용되는 사례가 적지 않아 걱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과거에 관심을 둔다. 누군가의 경험을 듣는 일은 즐겁기까지 하다. 전기나 자서전, 회고록에 호기심을 보인다. 체험기와 여행기도 흥미롭게 읽는다. 남의 일기장을 슬쩍하다가 등짝에 불이 난 경험에 미소를 짓는다. 자기소개서 없이는 운신을 못 하는 세상으로 변했다.
심지어 약력, 경력은 장례식장에도 따라 다닌다. 과거사 알리기든, 과거사 뒤지기든 심한 편이다. 다시 족보를 들고 다녀야 할 몽상적 세상으로 되돌아가는 건 아닌가? 갸우뚱해진다.

국가와 사회적인 명사 혹은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사람의 지난날을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스스로 지나치고 빈번하게 과장 왜곡하고 자화자찬으로 포장된 회상은 사절이다. 실패담이든, 부끄러운 면이든 솔직한 과거에 귀를 세운다.
있었던 그대로의 회고 안에서 나름의 자성과 앞날의 소견이 진솔하고 설득력 있게 적시되었을 때 비로소 그 과거사를 공유하고 서로 소통하는 기쁨을 찾는다. 그것은 바로 일체감을 동반하는 저릿함이다. 반면교사와 대리 만족을 대하는 즐거움이다.
잘난 척 폼 잡으려고 쓴 글은 독자가 외면한다. 훈도하거나 거짓 또한 독자를 잃는다. 문학은 리얼리티, 체험적 진실에 근거를 둔다. 특히 수필은 자기 고백적 문학이다. 자기 자신의 솔직한 삶을 다룬다. 늙었다고 이 정도(正道)를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이 나이에도 글을 써서 발표할 수 있어 노복이라 여긴다.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다.

기사 등록일: 2018-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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