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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시마코스의 변명 (하) _조현정의 시대공감(4)
 
플라톤: 선생님은 여전히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정의를 이야기하시는군요. 정의가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변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정의라 할 수 있습니까?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어떤 사람에게는 정의가 다른 사람에게는 불의가 될 수 있고, 어떤 시대에는 불의가, 다른 시대에는 정의가 될 수 있다는 말이지요. 만약 정의가 그렇게 변하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자신이 도덕적으로 살아야 할 이유를 잃고 말 것입니다. 정의는 시대와 지역, 신분을 초월해서 보편적으로 있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불의를 정의라고 우기기도 하고, 정의를 불의로 매도하는 일이 있을 뿐이지요. 소크라테스를 죽인 사람들은 불의한 사람들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도 속으로는 그것을 알고 있었죠. 예수를 죽인 것도 불의란 것을 사람들은 압니다. 가끔은 선동과 세뇌를 통해 진짜 불의를 정의로 믿는 사람들이 있기는 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을 뿐 정의는 변하지 않는 것이지요.

트라시마코스: 자네는 정의가 사람들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군. 예전에 프로타고라스 선생이 말한 것처럼 “인간이 만물의 척도”네. 사람 없이 정의가 어디 있는가? 만약 있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정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끊임없이 변하는 것처럼 정의도 변하게 마련이네. 다시 말하지만 예수가 한때는 불의였다가 힘을 얻자 정의가 되었네. 이 후에 기독교 지도자들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얼마나 죽였나?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이단이라 몰고 마녀라 죽이지 않았나? 개신교의 경우도 그렇네. 힘이 없던 시절 종교개혁을 꿈 꾸었던 후스와 브루노는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했지. 루터는 영주를 비롯한 정치 권력의 힘을 빌릴 수 있었기 때문에 또 다른 정의로 설 수 있었어. 만약 개신교가 힘이 없었다면 이단으로 몰살당해서 지금 그 명맥을 찾아 볼 수도 없었을거야. 그런데 그 개신교도 재세례파를 다시 이단으로 몰아 죽이기에 앞장서지 않았나? 평화주의자였던 재세례파들은 구교와 신교 모두의 공격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끔찍하게 죽었지.

플라톤: 선생님 말대로라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언제나 힘이 센 사람이 정의의 기준이 되겠군요.

트라시마코스: 내가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나. 이제야 내 말을 이해하는구만.

플라톤: 선생님, 선생님의 주장이야 일찍부터 알고 있었고 여전히 선생님은 진짜 정의와 합리화된 정의를 구분 못하시는 것 같군요. 중세 종교지도자들이 정의라는 명목으로 사람을 죽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불의 입니다. 개신교가 재세례파를 죽인 것도 불의입니다. 누구도 사람의 목숨을 해하는 사람은 불의한 것이지요.
그리고 선생님의 말 대로라면 모든 사람들은 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고 살아가는 게 맞겠지요. 모두가 강자만을 바라보며 일렬로 줄을 서는 것이 맞겠지요. 현재의 강자를 끌어 내릴 힘이 없다면 함부로 대항하거나 저항하면 안 되는 것이 맞겠지요. 힘이 곧 정의니까요. 그러나 역사를 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수도 없이 있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소크라테스와 예수가 그랬고, 브루노나 후스가 그랬습니다. 저기 저 한국을 보시죠. 강한 힘을 가진 일본에 굴복하지 않고 자유와 평화, 정의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1980년 광주에서는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시민들이 총칼로 무장한 군대에 맞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했습니다. 전태일이라는 청년은 아무런 힘이 없었지만 목숨을 걸고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죽었습니다. 이러한 희생들은 힘의 논리가 아니라 정의의 원리에 따라 움직인 사람들이죠. 그리고 그들을 통해 세상은 조금씩 변해 온 것이구요.

트라시마코스: 그래 자네 말처럼 지금 한국을 보게. 독립운동가들의 후손, 민주투사의 후손들은 여전히 어렵게 살고 있지. 반면 친일파가 되었다가 친미파가 되었다가 하면서 힘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은 여전히 사회지도층으로 떵떵거리며 살지. 그것뿐만이 아니라 반공에 앞장 선 민족의 영웅으로 둔갑하여 사는 사람들도 있었네. 이상적인 정의가 도대체 어디 있는가? 결국 힘있는 자가 이기는 것이지.

플라톤: 한국의 국민들 다수는 친일파를 정의로운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떵떵거리고 사는 것이 정의라 생각하지 않죠. 얼마 전 한국의 촛불집회를 보십시오. 정의를 꿈꾸는 시민들이 모여서 불의한 권력을 평화적으로 내몰지 않았습니까? 구한말에서부터 지금까지의 한국을 돌아보세요. 힘들고 억울한 일들이 지금도 없지 않지만 정의는 변함이 없고 사람들은 그 빛을 따라 조금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트라시마코스: 자네는 여전히 이상주의자구만.

플라톤: 선생님은 여전히 삐딱하시군요.

플라톤 이후로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구사회에서 정의는 보편적이고 그 목적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대세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정의는 상대적이고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생각도 만만치 않게 커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래 전에는 당연히 무시되던 트라시마코스의 명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말을 오늘에 와서는 다시 곱씹어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트라시마코스와 플라톤 중 누구의 말에 더 공감하십니까? (끝)

기사 등록일: 2017-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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