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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장희빈에 얽힌 이야기(3)

- 인현왕후와 서인 -

전철 3호선 안국역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가면 풍문여고가 나온다. 그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면 덕성 여중고가 나오고 구 경기고등학교(현재 정독 도서관)가 나오는데 그 골목길을 감고당길이라고 한다. 북촌일대가 15년 전만 해도 한적하고 고즈넉한 한옥 주택가였는데 이젠 상업지대가 되었다. 그 북촌일대에는 노론들이 많이 살았는데 인현왕후 민씨 아버지 민유중도 북촌에 살았다.
숙종이 인현왕후에게 새장가 든 후 왕비 친정을 위해 지은 집이 감고당으로 민유중이 살았는데 덕성여고 자리에 있었다. 인현왕후가 폐위 되고 6년간 지낸 곳이기도 하고 그후 민씨 문중에서 관리했다. 명성왕후 민비 아버지 민치록이 감고당 관리를 맡았기에 명성왕후도 감고당으로 이사와 자랐으니 감고당은 조선 왕비 2명의 숨결이 깃들여 있는 곳이다.
덕성여고 자리에 있던 감고당은 쌍문동 덕성여대로 옮겼다가 명성왕후 민비 생가가 있는 여주로 옮겨갔다. 감고당이라는 편액은 영조가 내려 준 것으로 인현왕후 민씨가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를 돌봐 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다.
본처 죽고 6개월도 안되 새장가 들었지만 숙종과 인현왕후는 좋은 사이가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이 혼인은 숙종이 원해서라기 보다 서인의 수호자 명성왕후 김씨와 서인의 거물 송시열이 정치적 고려를 해서 택한 정략결혼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숙종은 몸이 약하고 건강에 문제가 많아 병을 달고 살다시피 했다. 숙종의 건강문제로 신하들은 겉으로 말은 안했지만 후사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빨리 원자가 탄생해서 후계문제를 정해놓는 게 정국 회오리 바람을 피하는 길이었다. 명성왕후가 숙종의 재혼을 서두른 것에는 그런 문제도 있었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뜻대로만 안되는 게 아니라서 인현왕후와 숙종사이에는 자녀가 태어나지 않아 서인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 인현왕후와 장희빈 -

장희빈이 다시 대궐로 돌아와 숙종의 사랑을 받은 것은 장희빈의 재입궁을 인현왕후가 주선했다고 하지만 정황상으로 볼 때 대왕대비인 자의대비 조씨의 힘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다시 입궁한 시기는 명성왕후 3년상이 끝나고 난 후이다. 실록에 의하면 명성왕후 대상이 숙종 11년(1685년) 12월5일이었다.
우리가 흔히 3년상이라고 하는데 햇수로 3년이고 만 2년이다. 돌아가신 지 만 1년 되는 날 제사지내는 것을 소상(小祥), 만 2년 되는 날 제사를 대상(大祥)이라 한다. 대상이 지나면 상복을 벗는다. 소상, 대상에 죽을 상(喪)을 쓰지 않고 상서로울 상(祥)을 쓰는 것에서 우리 조상들이 삶과 죽음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알 수 있다.
실록에 의하면 신하들이 숙종에게 후궁 들일 것을 권하는데 1686년 2월 말이다. 즉 명성왕후 대상 지나고 2개월 지나 숙종에게 후궁을 들이자는 의론이 생겼다. 아마 그 즈음에 장희빈의 재입국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숙종이 장희빈만 너무 찾으니 서인들로서는 곤란했을 것이다. 같은 서인인 인현왕후에게서는 태기가 없고 숙종은 출신성분이 남인으로 분류되는 장희빈만 찾으니 견제가 필요했다. 그래서 서인의 영수인 김수항의 종손녀를 후궁으로 들이기로 했으니 영빈 김씨이다. 영빈 김씨는 김수항의 조카인 김창국의 딸이다.
참고로 인현왕후가 숙종과 혼인을 할 때 14세, 숙종이 20세, 장희빈 22세였다. 장희빈의 미모가 뛰어나기도 했지만 나이로 볼 때 숙종이 인현왕후 보다 장희빈을 찾은 게 이해가 된다. 또한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숙종이 인현왕후를 맞이 하던 날 중궁전에 갔다 그냥 나오면서 “다시 가기 싫다”고 말했다고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인현왕후가 여자로서 매력이 없었던 게 아닌가 추측할 수 있다.
그래서 장희빈을 견제하기 위해 영빈 김씨를 후궁으로 맞이했는데 숙종이 계속 장희빈만 찾아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신하들이 “여색을 탐하지 말고 종사를 생각하라”고 했으나 남녀문제가 그렇게 이성적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실록 기록에 의하면 장희빈 성격이 교만 방자해 인현왕후가 시키는 일에 대해 고분고분 순종하지 않고 교만하고 무시하는 태도를 취했고 불러도 오지 않아 인현왕후가 종아리를 때린 적도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실록 편찬 총 책임자가 인현왕후 동생인 민진원으로 장희빈에 대해 과장이 심하고 악의적 기록으로 일관하지만 두 사람 사이가 나빴던 것은 사실이다. 또한 대왕대비 자의대비 조씨도 장희빈만 총애하고 인현왕후와 관계가 소원한 것으로 쓰고 있는데 숭선군 이징의 아내 신씨가 중간에서 농간을 부려 자의대비 조씨의 마음을 흐리게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여튼 인현왕후는 14세에 왕비가 되었으나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왕실 최고 어른인 자의대비에게도 인정을 못받는 불운한 왕비였다.

- 장희빈의 득남 -

장희빈이 아들을 낳은 것은 숙종14년(1688년) 10월27일이다. 실록은 “소의 장씨가 아들을 낳았다”고 단 한줄 기록하고 있다. 이 분이 숙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경종이다. 조선시대 왕들이 대개 자손이 귀한데 숙종도 마찬가지다. 장희빈에게서 아들 둘을 보았는데 경종이 장남이고 차남은 일찍 죽었다.
그 후 숙빈 최씨에게서 아들 셋을 보았는데 연잉군(영조)만 살아남고 둘은 일찍 죽었다. 그리고 명빈 박씨에게서 6남 연령군이 태어났다. 한 때 장희빈이 정비였지만 정비에게서는 아들이 없고 3명의 후궁에게서 6명의 아들을 낳아 3명이 살아났으니 반타작 한 것인데 조선시대에는 유아 사망율이 높았다.
장희빈이 아들을 낳자 서인이 일당독주 하던 상황이 일변했다. 아들 낳을 때 소의였던 장희빈은 곧 빈으로 승격해 희빈 장씨가 되었는데 희빈 장씨 혹은 장희빈이 이름처럼 굳어졌다. 소의에서 희빈으로 승격하던 날 아들 윤(昀)은 원자로 정호 되었다. 원자(元子)가 되었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장남으로 인정되었다는 뜻이다.
세자가 대권을 이어받을 정식후보라면 원자는 예비후보로서 별 일이 없는 한 원자-세자를 거쳐 대권을 이어받게 된다. 설령 정비 인현왕후가 나중에 아들을 낳더라도 원자 윤이 세자가 되어 대권을 이어가게 된다. 숙종은 대권을 이을 아들이 없어 고민이 많았고 “이렇다 지하에서 조상님들을 어찌 대할까?”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아들이 태어나자 기쁘기 이를때가 없었다.
그러나 아들 윤을 원자로 정호할 때부터 서인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송시열이 상소를 올렸다. 그 때 송시열은 82세로서 봉조하(奉朝賀)였다. 봉조하는 은퇴한 고위관리에게 주는 명예직으로 국가로부터 녹봉을 받았다. 노회한 송시열은 서인당의 영원한 당대표로서 절대적 권위를 갖고 있었다.
송시열은 상소에서 지나(차이나)의 고사를 예로 들며 원자 정호가 빨랐다고 지적했다. 송 나라 신종의 아들 철종이 10살 때까지 번왕으로 있다 신종이 병이 들자 비로소 태자로 책봉된 예를 든 것이다.
상소는 모두 2통으로 다 읽고나자 날이 이미 어두워졌다. 숙종은 불쾌한 표정으로 신하들의 의견을 물었다. 서인들은 애매모호한 대답을 했다. 숙종 앞에서 대놓고 원자 정호가 빨랐다고 말할 수도 없고 당대표 말이 틀렸다고 할 수도 없었으니 말이다. 이현기가 “명나라 때는 4개월 만에 태자를 책봉한 적도 있는데 그럼 그건 뭐냐?”고 송시열의 상소를 반박했다.
숙종은 그 날 서인들이 있는 한 세자 책봉이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왕명으로 정해진 원자 정호를 놓고도 신하들이 빨랐다 늦었다 시비를 거는데 앞으로 세자책봉을 놓고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기사 등록일: 2013-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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