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 저승의 동반자 남이 와 강순(2)
세조실록 1468년 5월1일 기록에서 물 불 안 가리는 남이의 직선적 성격을 알 수 있다.이날은 잔치가 있어 무장들이 활 쏘기 대회를 했는데 남이는 술이 취해 세조 앞에서 “구성군 이준만 사랑하는데 잘못된 일입니다.”라고 대든다.
세조는 “구성군 이준은 내 조카이고 국가에 큰 공을 세웠는데 내가 구성군을 사랑하지 누구를 사랑 하겠느냐?”라면서 “너 그 이야기 누구하고 했어?”라고 물으니 “혼자 생각”이라고 대답했다. “남이를 당장 하옥시키라.”라는 명이 떨어졌다. 의금부 감옥에 갇혔던 남이는 하루 만에 옥에서 풀려 났으나 겸사복장에서 파직 당했다.
겸사복장은 궁궐 수비와 국왕 경호를 맡은 친위대 지휘관이다. 파직당한 것을 위로하는 사람들에게 남이는 “내가 잘못 말한 게 뭐가 있냐?”고 반문했다. 겸사복장은 다른 직책과 겸할 수 있는데 이 때 남이는 공조판서와 겸사복장을 겸하고 있었는데 기록을 보면 겸사복장만 파직 당하고 공조판서로 조정에 계속 출사했다.
남이가 죽기 두 달 전인 7월15일 세조에게 “북쪽이 자꾸 시끄러운데 오랑캐를 쳐부수겠다. 저들을 20만명만 복속 시키면 천하를 주름잡을 수 있다.”고 말하나 세조는 “말이 지나치다.”고 나무라면서 “오랑캐들은 늘 말썽을 피우니 지금은 현상유지 하는 게 좋겠다.”면서 남이를 달랜다. 이 때 세조가 남이를 북쪽으로 보내 여진족 정벌을 하게 했으면 역사는 또 달라졌을 것이다.
남이의 옥사에 연루되어 같이 역적으로 처단 당한 강순(1390-1468.10.27)은 갑사출신으로 왜구, 여진족 정벌에 큰 공을 세워 주요 지휘관을 고루 거쳐 영의정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세종26년(1444년) 기록에 강순은 제주도 지현사 겸 천호라는 하위직 무관으로 왜구를 사살하고 사로잡는 공을 세운 기록이 나온다.
강순은 세조 때 함경도 도절제사를 오랜 기간 지내 여진족 내부 사정에 밝아 세조는 “임기가 지나 다른 직책으로 옮겨야 하나 마땅한 사람이 없으니 내 뜻을 헤아려 수고를 더해 달라.”고 할 정도로 조선 초, 중기 북방 경영에 뛰어난 업적을 보였고이시애의 난 과 여진족 건주위 정벌에 종군해 큰 공을 세웠다.
이시애는 함경도에서 대대로 살아온 지방유지로 이시애 할아버지는 이성계 형 이원계와 친구로 함경도 사람들은 이성계와 같은 고향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중앙에서 파견된 관찰사(도지사)및 관리들이 횡포를 부리고과중한 세금과 부역을 부과하고 주민들을 무시하자 이것이 이시애가 동조자들을 모아 무력항쟁을 시작하는 시초가 되었다.
조정에서는 구성군 이준을 총사령으로,좌찬성 조석문을 부사령으로, 상을 당해 장단에 내려가 있던 허종을 불러 함결도 절제사로, 좌승지 어세공을 함경도 관찰사로 삼아 무력진압을 시작했으나 사세가 여의치 않자 중추원 지사 강순을 진북장군에 임명하고 평안도 병력 3,000명을 배속시켜 함경도로 보내고 어유소에게도 정예군사 1,000명을 배속시켜 함경도로 보냈다.
강순은 조정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북청 진입작전과 만령전투를 성공리에 마쳤다. 이때 남이는 강순의 지휘를 받아 이숙기와 함께 큰 공을 세웠다. 강순은 무공을 인정받아 공신1호에 책록,우의정으로 승진하고 산양군에 봉해졌다.
함경도에서 개선한지 며칠 지난 세조13년(1467년) 9월21일 강순은 건주위 정벌에 주장(主將)으로 임명되었다. 공식적으로는 9월20일 개선해 다음 날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조선과 명나라는 여진족에 대해 회유책, 강경책을 번갈아 사용했는데 명나라에서 건주위 정벌을 요청해왔다. 이에 조정에서는 우의정 강순을 주장, 평안도 수군절도사 어유소를 좌상대장, 중추부 지사 남이를 우상대장, 병력 10,000명으로 건주위 여진족을 정벌하게 했다.
서정장군에 임명된 강순은 병력을 인솔해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진군해 파저강에서 추장 이만주가 거느리는 여진족을 소탕하는 전공을 세워 명나라 황제로부터 은 20량과 비단을 상으로 받았다. 파저강 전투에서도 남이는 강순을 도와 추장 이만주 및 여진 지휘부 24명을 전멸시키고 여진족 사살 175명, 포로 24명을 잡는 전공을 세웠다.
함경도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정변은 구성군 이준을 비롯해 강순, 남이, 어유소, 허종의 활약으로 진압되었으나 세조는 이 사건을 계기로 급속히 건강이 악화되었다. 특히 조선의 정치 특성은 왕권보다 신권이 강한 군약신강으로서 태종은 공신들과 외척을 제거하는 악역을 맡아 왕권 강화에 힘썼다.
세조도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이시애의 정변을 계기로 떠오른 이준, 남이, 강순등을 중용하는 한편 공신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이미 몸에 병이 깊어 공신 제거는커녕 자기 몸 건사하기에도 역부족이었다. 또한 한명회, 신숙주, 한계희등 공신세력들은 상대하기에 이들 신진세력들은 너무 부족했다.
세조는 죽기 2개월 전 이준을 영의정에 임명했고 죽기 직전인 8월23일 남이를 병조판서에 임명해 사후를 대비했다. 구성군 이준은 세조의 친조카로서 어머니는 남지의 딸이었다. 남지, 남간, 남휘는 개국공신 남재의 손자들로서 남휘의 손자가 남이다. 그러니까 이준과 남이는 외가로 6촌 형제사이다.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했다. 예종이 즉위하자 이준은 영의정에서 밀려났고 남이와 강순은 역모에 걸려 죽었다. 공신들의 세력이 너무 커질 것 염려해 죽기 전에 세조가 포석해 놓은 것은 물거품이 되었다. 남이는 “선왕이 우리를 아들처럼 사랑했는데 그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고 말했으나 정작 뜻을 합해야 할 이준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세조는 곧 죽을 것을 알고 세자에게 9월7일 왕위에 오르게 하고 9월8일 죽었다. 예종이 왕위에 오른 날 중추원 지사 한계희가 “남이의 인간 됨됨이가 병권을 맡기기에는 마땅하지 않다.”고 말해 남이는 세조가 죽기 하루 전에 병조판서에서 밀려났고 한 달이 겨우 지난 10월24일 유자광의 고변으로 역적 신분으로 잡혀왔다.
남이와 유자광은 이시애 난이 일어났을 때 같이 종군했던 사이로 남이는 대궐에서 숙직할 때 유자광에게 한명회를 간신으로 지목하며 간신이 역모를 꾸미면 우리는 개죽음한다고 말했는데 그 말이 나중에 남이가 역모를 꾸미는 것으로 변해 있었다.
남이의 북정가를 유자광이 역모사건에 이용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조정에서 남이를 국문하면서 사람들 보내 남아 이십 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인지 남아 이십 미득국(男兒二十未得國)인지 보고 오라고 했다. 未平國, 未得國에 따라 목숨이 왔다 갔다 하게 생긴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북정가를 보고 온 사람들이 未得國이라고 쓰여 있다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남이에게 핍박을 받은 귀신들이 “복수할 때가 왔다”면서 북정가 글자를 확인하려 보낸 사람의 눈을 홀려 미평국을 미득국으로 읽게 했다는 것이다. 귀신의 장난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남이는 역적으로 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