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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저승 동반자 남이 와 강순(3)

남이를 역모로 고변한 것은 유자광이다. 이것은 배 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 유자광의 품성 탓도 있지만 실상은 유자광은 앞장서서 총대 메고 바람 잡는 역할을 했을 뿐이고 일을 뒤에서 꾸미고 주도한 것은 한명회, 신숙주등구공신들이었다. 구공신들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수양대군을 왕위에 올린 쿠데타 동지들로이시애 난을 계기로 새롭게 부상하는 이준, 남이, 강순 등 신공신파를 견제했다.
이준, 남이는 음모와 모략이 춤추는 아사리판정치와는 맞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직선적이고 다혈질의 물불 안 가리고 왕에게도 대드는 남이의 성품은 권모술수와는 거리가 전형적 무인으로 같은 신공신파인 이준과도 사이가 나빴다는 것은 불행이었다.
유자광의 고변으로남이가 잡혀와 심문을 받았다. 말이 심문이지 이미 죽이려고 작정한 것이다. 심문의 최고책임자는 우연찮게도 영의정 이준이었다. 역모의 증거는 대궐에서 숙직하면서 유자광과 나눈 혜성이 나타난 것과 관련해옛 것이 물러가고 새것이 온다는 이야기, 세조가 죽어 국상이 났는데 간신들이 장난하면 우리는 세조에게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간신을 처단해야 한다는 이야기, 북정가의男兒二十未得國등이었다.
예종실록 10월24일 기록을 보면 남이가 여진족 소탕하듯 구공신들을 소탕할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권모술수와 음모, 모략의 달인들을 여진족 소탕하듯 하려 했으니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남이의 단순한 생각은 정치공작의 명수 한명회에게 이용 당했다. 신공신파는 남이파, 이준파가 있었는데 유자광은 굳이 분류하자면 남이파에 속했다. 한명회는 유자광을 상대로 공작을 폈다.
무지막지한 고문에도 역모를 부인하던 남이는 다리뼈가 부러지자 역모를 시인하며 묶은 것을 느슨하게 풀어 달라고 하면서 술을 한 잔 달라고 했다. “내가 역모를 부인한 것은 나중에라도 공을 세워 수치를 씻고자 함이었는데 다리뼈가 부러졌으니 무인으로 공을 세우기는 틀렸다.” 삶을 포기한 남이는 요즘 말로 하면 검사의 공소사실을 모두 시인한 것이다.
“누구와 같이 역모를 꾸몄냐?”는 말에 강순을 지목했다. 심문관으로 참여하고 있던 강순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사실이건 아니건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면 즉각 직위해제 되고 피의자 신분이 되는 것이 조선시대 사법제도다. “제가 갑사에서부터 출세해 이 자리에 올랐는데 뭐가 부족해서 역모를 꾸미겠습니까?”예종은 그 말을 옳게 여겼다.
그러자 남이가 말했다. “역모자 대라고 해서 댔더니 내 말을 안 믿고 그 말을 믿는다면 나 보고 이름 대라고 할 필요가 뭐가 있냐?” 졸지에 역적으로 몰린 강순은 곤장부터 맞았다. 매를 못 이긴 강순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역모를 꾸몄다고 거짓 자백을 했다.
“또 누구야?” 왕(예종)이 물었다. “여기 있는 사람 다 역모에 가담했다고 하면 믿겠습니까?” 빈정거리는 말에 왕은 더 이상 묻지 않고 허종을 지목했다. “허종은?”“허종은 충직한 사람입니다. 믿고 쓰십시오.”허종도 신공신파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강순은 황당했다. 형장으로 끌려가며 남이에게 따졌다. “내가 언제 너와 역적모의 했냐?”“내가 억울하게 당하는 것은 당신이 잘 알지 않소? 당신 억울하게 죽나 나 억울하게 죽나 마찬가지요.” 여진족 정벌할 때 지휘관 과 수하 장군으로 만난 두 사람을 비롯해 조경치, 문효량등 10여몀이 역적으로 몰려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을 받았다.
유자광, 한명회, 신숙주 한계순, 이준 등등 30여명이 익대공신 칭호를 받았다. 공신 칭호 받은 자들의 면면을 보면 이 사건의 성격을 알 수 있다.
남이에게는 남구을금이란 딸이 있었는데 역모사건 후 한명회의 종으로 끌려갔다. 남이는 권람의 사위였으니 남구을금은권람의 외손녀다. 그런데 한명회와 권람은 백수 시절부터 절친한 둘도 없는 친구였는데 친구의 사위를 역모로 몰고 외손녀 딸을 노비로 받은 것인데 권람이 살아 있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역모사건을 즈음해서 기록에는 남이가 공주와 증(蒸)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증이란 것은 근친관계를 가졌다는 것인데 남이가 근친관계를 가질 공주는 할머니 정선공주(태종의 네 째 딸)인데 정선공주는 남이가 태어나기 17년 전에 죽었으니 공주와 증 했다는 기록은 악의적 의도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남이의 역모는 중종 때 조광조가 “조작된 사건이니 관련자를 복권 시켜야 한다”해서 복권이 진행 중 조광조가 기묘사화에 걸려 죽어 흐지부지 되었다 거의 400여년이 지난 순조 때 복권되었다. 남이에 관한 전설이 많은 것은 젊은 나이에 역적으로 죽은 청년장군의 죽음을 애틋하게 여긴 민중이 넋을 위로하고자 만들어낸 것이다.
해마다 10월 용산에서는 남이장군 사당제가 열린다. 이곳은 남이장군이여진족 정벌을 위해 군사훈련 시키던 곳이다. 또한 남이장군은 최영장군, 임경업장군과 함께 무속신으로 모셔진다.
세상에는 억울한 죽음이 많지만 남이장군도 억울하게 죽었다. 그러나 남이장군 만큼이나 억울하게 죽은 경우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성격상 한나라당의 음모, 모략, 권모술수를 이겨내기에 버거워 자살을 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논두렁 시계사건이 있다. 남이가 공주와 증(蒸)했다는 기록이 역적으로 몰기 위한 분위기 조성용 모략이듯 논두렁 시계사건도 노무현을 파렴치범으로 몰기 위한 전주곡이었다.
박연차 회장이 1억짜리 시계 두개를 선물한 것은 노무현 부부가 아니라 노건평씨 부부였다. 노건평씨 부인이 권양숙여사에게 시계 받은 이야기를 전화로 하면서 “회갑 기념이라는데 받아도 되지 않을까?” 해서 “돌려주던지 형님이 갖던지 하라.”고 거절했다.
시계는 구경도 못해본 노무현 부부는 나중에 박연차 회장이 수사대상에 오르자 시계문제가 불거질 것에 대해 권양숙여사가 방도를 묻자 이야기 하던 중에 “논두렁에 버렸다고 하던지” 라고 말한 것이 전직 대통령을 감시하고 도청하던 조직에 걸려들었고 왜곡과 조작의 대가인 조중동에서 전후 사정은 다 빼고 “논두렁에 버렸다”만 대서특필해 전직대통령 망신주기에 성공했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정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음모, 모략, 권모술수는 변한 것이 없고 “죽여야겠다”고 조직적으로 작심하고 덤벼들면 당하는 수밖에 없다. 남이장군 만큼이나 억울하게 죽은 노무현 전대통령도 무속에서 신앙대상이 되어 억울하고 한 많은 사람들의 사연을 들어주는 무속신이 될 날이 오지 않을까?

기사 등록일: 2012-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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