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 사라진 샛별 이준, 최연소 영의정 이야기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를 비롯해 무수한 업적을 남긴 위대한 군주지만 자녀생산에도 많은 업적을 남겨 정실부인 소헌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만 해도 8남2녀다. 후궁 10명에게서 태어난 자녀는 15명이다.
장남은 이향으로 왕세자이자 왕위에 올라 문종이 된 인물, 차남이 이유(李瑈)로 조카 죽이고 왕위 차지한 수양대군이다. 4남이 임영대군 이구인데 이구는 작은 형 이유가 왕이 된 것을 찬성한 인물로 두 사람은 가깝게 지냈다. 같은 형제라도 이유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한 금성대군이나 안평대군은 죽음을 당 했다.
임영대군은 무술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것이 수양대군과 닮았고 성격이 담백하고 우의를 중요하게 여기고 진실한 성격이라고 전한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단점보다 장점이 많은 사람인데 그의 단점은 여자문제로 세종 때도 여자문제로 물의를 여러 번 일으켜 두 번이나 대군 지위를 빼앗기고 강등 당하기도 했다.
두 번째 대군지위를 빼앗길 때는 이복동생 화의군과 함께 밖에 나가 여자 두 명을 꼬여 대궐로 몰래 숨어 들어오다 광화문을 지키는 금군에 발각되었다. 외부인을 허락도 없이 대궐로 데려오는 것은 국왕 경호와도 관계 되는 일로 세종은 넷째 아들의 대군 지위를 다시 빼앗고 3년 가까이 대궐에 연금 시켰다.
임영대군이 10대부터 여자문제로 말썽을 부린 것은 불행했던 결혼생활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는 여자문제로 무수히 말썽을 일으키다 이복동생과 함께 말썽을 부린 이후로는 본래 성품으로 돌아가 부왕을 도와 군기감에서 일하면서 총통, 화차 등 무기 만드는 일에 열중하고 큰형인 문종의 명을 받들어 화차 제작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의 첫 번째 부인은 재상 남지의 딸이었으나 한 달 만에 이혼했다. 왕조실록은 “남지의 딸이 12살인데 소변을 못 가리고 눈동자가 흐리고 행동이 놀라고 미친듯한 모습”을 보여 세종이 3 정승(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우의정 최윤덕)과 의논 후 이혼 시켰다. 남씨의 병은 지금으로 치자면 일종의 정신질환, 간질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며느리를 내보내면서 세종이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큰 며느리 휘빈 김씨가 방자한 행동을 하다 쫓겨난 지 4년만에 넷째 며느리를 또 내보내야 하니 “왕실로 시집가면 내쫓기는 건 보증수표”라는 말이 백성들 사이에서 나돌며 수군거릴 것이고, 집안 다스리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죽어서 조상 뵐 면목도 없고,결혼생활 불가능한 게 명백한데 그냥 둘 수도 없으니 천하의 명군 세종대왕도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보낼 수 밖에 없었다.
남구만이 지은 약천집에 의하면 남지의 손자인 남계가 홀로 된 고모(임영대군과 이혼한 남지의 딸)를 모시고 살다 돌아가시자 적성군 북면 고동에 있는 산에 장례 지냈다고 한다.
성종 때 문인이자 역관을 지낸 조신이 지은 소문쇄록에 의하면 남지의 큰딸은 아들을 낳지 못해 쫓겨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지의 둘째 딸은 안평대군의 며느리가 되었다.
남지의 딸과 이혼할 때 임영대군 나이 15세였는데 당시에는 조혼이 사회적 풍조였으니 지금 기준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그 해 12월 최승녕의 딸과 재혼해 5남2녀를 두었고 세 번째 부인 안씨와 사이에서 4남5녀를 낳았는데 두 번째 부인 최씨와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구성군 이준이다. 세 번째 부인 안씨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
이준이 무과에 합격하던 해, 1465년 9월의 일이다. 가을빛이 곱게 들어 대궐 담을 수 놓고 있는 계절에 임영대군 이구는 아들 구성군 이준과 함께 입궐했다. 부자의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 있어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부자는 세조를 알현했다. 사적으로는 형이고 삼촌이지만 공식적으로는 왕과 신하의 관계다. 부자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한 통 내 놓았다.
문제의 편지는 세조의 후궁 덕중이 이준에게 보낸 연애편지였다. 이준은 귀공자에 헌헌장부로 한창 때인 24세 청년이었다. 덕중은 원래 수양대군(세조)집 몸종이었다 수양이 왕이 되면서 대궐로 들어왔다. 그녀는 수양과 사이에 아들이 한 명 있었으나 일찍 죽었고 왕에게는 본 부인뿐 아니라 줄줄이 후궁들이 있으니 왕의 관심을 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수양이 왕이 되자 덕중은 정3품 소용이 되었다. 왕의 후궁들은 정1품 빈부터 종4품 숙원까지 8 품계가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장희빈은 정1품으로 대개 왕자를 낳은 후궁들이 빈이 된다. 우리는 장희빈을 약간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도 장희빈이 품계로 따지면 영의정과 동급이다. 그러다 인현왕후 대신 왕비가 되었는데 왕비는 왕과 동격으로 품계가 없는 무품이다.
덕중은 전에도 환관 송중에게 연모의 편지를 보냈다 말썽이 된 적이 있었는데 왕과 사이에 아들까지 낳은 사이라서 그때는 그냥 불문에 부쳤는데 또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그때도 송중은 아무런 잘못도 없이 왕의 여자로부터 온 편지 받았다는 죄 같지도 않은 죄로 곤장을 80대나 맞았다.
그러나 이번 일은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상대가 조카 이준이라니 이런 망신이 있나. 덜덜 떠는 이준에게 “너는 죄가 없다. 네 잘못이 아니고 너는 오히려 즉시 내게 와서 사실대로 말했으니 칭찬받고 상을 받을 일이지 죄 될 것은 없으니 걱정 말아라.”
그러나 당사자 덕중과 중간에서 편지 전달을 한 환관 최호와 김중호는 무사하지 못했다. “가르쳐도 소용없는 게 부시(婦侍 아녀자와 환관)라 내가 평소 엄하게 다스렸는데도 이런 일이 생겼다”라고 말하는 세조라 이들이 무사할 수는 없다.
사건 당사자 덕중은 지난번 송중에게 편지 한 것까지 가중처벌이 적용되어 교수형에 처해졌고 최호와 김중호는 “그래도 글을 읽어 사리판단을 할만한 인간들인데 중간에서 아녀자 연애편지 심부름이나 한 죄목”이 적용되어 맞아 죽었다. 때려 죽이는 형벌을 박살이라 한다. 우리가 흔히 “박살 낸다” 라고 하는데 이런 끔찍한 말을 가려서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구성군 이준은 아버지 임영대군을 닮아서 무예가 절륜했다. 이성계 집안이 무인출신이라 그런지 조선 초기에는 무예에 조예가 깊은 종친들이 많았는데 이준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이준과 남이는 동갑(1441년생)으로 남이보다 늦게 과거에 급제했다. 두 명 모두 무과에 수석합격(장원급제)했는데 남이가 8년 먼저 합격했다.
이준은 왕실의 종친이고 남이도 외가 쪽이 왕족이라 둘 다 세조의 신임을 받았고 나이도 같고 실력도 중출하고 같은 무인이라 두 사람 사이에는 라이벌 의식이 있었다. 이준이 과거에는 늦게 합격 했으나 출세는 빨라 합격 후 이년 만에(1467년) 이시애 난 토벌군 총 사령관이 되었고 남이는 이준 휘하의 단위부대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바로 잡기: 12월30일 역사기행에 이준이 임영대군-남씨부인 소생으로 쓴 것은 족보를 잘못 보고 쓴 것으로 이준은 임영대군-최씨부인 소생으로 바로 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