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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공녀와 반역도배들(3)

고려시대 원나라와 관계는 종주국-식민지, 지배-피지배의 단순한 관계가 아니다. 왕조는 왕조대로 유지가 되면서 원의 간섭을 받은 것이 일제 식민지 시대와 다른 점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조선왕조가 문을 닫았으니까. 원나라 지배질서를 인정하면서 한편으로는 독자성을 유지하는 이중구조 속에서 고려인들은 살았다.
그러다 보니 홍복원 부자나 기철 형제들 같은 부원 반역배들이 생겼지만 단군을 조상으로 하는 한 핏줄이라는 민족공동체 의식이 생긴 것도 고려시대였다. 이규보의 동명왕전, 일연의 삼국유사,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고려인들에게 민족적 일체감을 불어넣어주어 외세(몽골)에 저항하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역사기록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의식을 담아내고 있다.
이규보는 고려의 문장가로 무신정권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문신으로 그는 뛰어난 문장력으로 대몽항쟁기에 강화에서 몽골로 가는 문서를 모두 맡아 작성했다. 그는 독창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사륜정(四輪亭)을 만들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사륜정은 가벼운 대나무로 지은 정자로 정자 기둥 네 개 아래 부분에 바퀴를 달아 이동할 수 있도록 고안된 고려시대에서는 획기적인 정자다.
이규보는 삼국사기가 민족 주체성을 소홀히 다룬 것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서사시 동명왕전을 지어 몽골과 항쟁기에 민족정신을 고취 시켰다. 동명왕전에서 이규보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정통왕조임을 강조하고 고구려의 강한 민족정신을 이어 받아 국난을 극복하는 시대정신을 반영했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은 승려로 속명은 김견명, 보각국사로 불리며 왕이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절을 할 만큼 존경을 받은 인물이다. 일연은 장기간에 걸친 몽골의 침공으로 고통 당하는 민중에게 구원의 희망을 주기 위해 신앙에 의지할 것을 권유했다. 막스 표현대로 “인민들에게 아편”을 준 것이다.
그러나 일연은 민중들에게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아편만 준 것이 아니라 실천불교 차원에서 거족적 위기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으로 삼국유사를 편찬했다. 일연은 중국 역대 창업주의 기이한 설화를 쓰고 삼국 시조의 기이한 것을 쓴 것이 어찌 불가한가? 라고 쓰고 있다.
제왕운기의 저자 이승휴는 강직하고 불의, 부정, 비리와 타협을 못해 고롭게 인생을 살다 간 유학자다. 그는 충렬왕 때 개혁정책을 실시하다 부역 반역자들에게 밀려나 강원도 삼척에 정착해 제왕운기를 지었다.
“요하 동쪽 땅에 따로 한 천지가 있으니 뚜렷이 중국과 구획을 지어 나누어져 있도다. 큰 파도 만경에 걸쳐 삼면을 에워싸고 북쪽에 육지가 줄처럼 이어져 있네. 가운데 땅덩이 천리가 바로 조선이니 강산의 아름다운 경치 그 이름 천하에 퍼졌구려.”
제왕운기의 편찬 목적은 고려와 한민족과의 지리적·문화적인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고려인은 중국과 구별되는 독자성·자주성·주체성을 가진 우수한 문화민족임을 국민 각자에게 자각하게 하여 몽골의 정치적 간섭에 대항하는 정신적 지주로 삼기 위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책은 중국사와 한국사를 각 권으로 분리하고 한민족이 단군을 시조로 하는 단일민족임을 나타냈고, 당시까지 신화로 전승된 단군신화를 한국사의 체계 속에 편입시켰다. 또한 발해를 최초로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인정하여 만주 일대도 고려의 영역이었음을 역사적으로 고증함으로써 영토회복의 뜻을 암시하고 있다.
민족의 주체성과 자주정신을 강조해 몽골의 간섭을 벗어나려는 노력과 함께 한쪽에서는 고려 왕조를 없애고 원나라의 일개 성(省)으로 편입 시키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몽골과 화친 이후 일본 정벌을 위해 고려에 정동행성이라는 기관을 설치했는데 일본 정벌 단념 이후 정동행성은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기관으로 고려의 자주성을 인정한다는 기관이었다.
고려왕조를 없애고 행중서성(行中書省)을 설치해 아예 원나라 일부가 되자는 것을 입성책동(立省策動)이라 하는데 입성책동을 주장한 자들은 부원 반역 배들이었다. 최초로 입성책동을 주장한 자는 충숙왕 1년(1309년) 요양행성우승 홍중희로 그는 “주인 무는 개” 홍복원의 손자이자 수박을 최초로 수입한 홍다구의 아들이었다.
그는 충숙왕이 국법을 어기며 폭정을 일삼는다고 원나라 황제에게 거짓 보고를 올리며 고려왕조를 없애자고 주장했다 무고가 발각되어 오히려 귀양을 갔다.
충숙왕 10년 이번에는 오잠 유청신이 입성책동을 주장했다. 그때는 충숙왕과 심양왕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졌는데 그 와중에서 오잠 유청신이 입성을 주장하며 이름까지 삼한행성(三韓行省)으로 지어 올렸다.
그 때 부원배들의 입성책동을 막아낸 것이 이제현이다.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제현은 성리학의 태두로서 이곡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으로 학통이 이어진다. 그는 역옹패설의 저자로 문학에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이제현은 역옹패설에서 “아무리 몽골어에 능숙하다 해도 공식석상인 합좌소에서는 몽골 사신과 이야기 할 때 직접 몽골어로 말하지 말고 통역(역관)을 통해 말 해야 한다”고 쓰고 있다. 또한 무신정권의 힘에 의한 공포정치를 권풍(拳風 주먹바람)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제현은 원나라에서 오랫동안 지낸 사람으로 부원배가 아니라 지원파(知元派)로 세조 구제를 인용해 입성의 부당함을 원나라 황제에게 역설하며 인맥을 동원해 원나라 조정에 입성을 막아줄 것을 요청해 고려가 원나라에 합방 되는 것을 막았다.
세조 구제란 원나라와 화친조약을 맺을 때 “고려의 국체를 보존하고 고유의 풍속을 지킨다”라는 약속이다.
그 후 충혜왕 때도 장백상이 입성을 주장했고 이운, 조익청, 기철도 입성을 주장했으나 원나라에서 입성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몇 백 년 세월이 흐른 후 역사를 공부하며 입성책동에 대해 부원 반역도당들이라고 비판할 수 있으나 그 시절 고려인들에게는 당연한 생각일는지 모른다. 당시 원나라는 세계 경제 정치 문화의 중심으로 수도 북경에는 전세계 문물이 몰려들었다. 멀리 이탈리아에서 마르코 폴로라는 사람도 여행 와서 머물며 견문록을 썼다.
원 제국의 국력, 군사력, 경제력, 정치력을 볼 때 고려는 비교가 안될 정도니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지 말고 차라리 원나라에 합방 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고려인들이 많았을 것이다.
마치 한국의 주류인 사이비 보수주의자들이 일제 식민지 된 것이 축복이고 미국화 되는 것이 세계화의 지름길 인양 오렌지를 어륀지로 발음하는 것처럼.
글로벌 스탠다드를 외치며 한미 FTA에 목 매는 검은 머리 미국인들, 전시 작전권 환수를 반대하며 군복에 선글라스 쓰고 나와 성조기 흔들며 반대 시위하는 전직 국방장관 참모총장들의 모습이 몇 백 년 전 원나라와 합방을 원하던 입성책동파의 모습과 겹쳐진다.

기사 등록일: 2012-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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