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 청해진 대사 장보고(1)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한 해상 왕
노예무역이라면 두 가지가 생각나는데 우선 영화 뿌리가 생각난다. 평화로운 아프리카 해안에서 뛰놀고 있는 소년들을 발견한 백인 노예상들이 마치 짐승이나 물고기 잡듯 그물을 던져 잡아서는 노예선에 태우는 장면, 또 하나는 찬송가 405장 Amazing grace를 작곡한 죤뉴톤, 그가 바로 알렉스헤일리의 조상이나 캐나다 최초의 흑인 총독 미쉘쟝의 조상들을 신대륙에 팔아먹은 노예상인 출신이었다.
이렇듯 노예무역이라면 17-18세기 신대륙의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한 노예무역을 연상하는데 노예무역은 고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장보고가 당나라에 있던 때에도 신라출신 노예들이 있었다. 신라출신 노예들은 미쉘쟝의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사슬에 묶인 채 시장에 끌려 나와 물건 거래하듯 사고 팔렸다.
장보고가 살던 신라 말기, 신라는 이미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고 중앙 정치무대는 귀족들의왕권 쟁탈, 권력투쟁으로 정신이 없었다. 장보고는 20대 초반 나이에 당나라로 건너갔다. 당시 당나라 수도 장안은 세계의 중심으로 아라비아, 페르시아 등 서역에서는 물론이고 로마에서도 사절이 오가는 국제 정치의 중심지였고 동서 교역의 중심지였다.
먼저 이민 온 선배 이민자들이 북미를 기회의 땅으로 알고 이민 오듯 장보고 역시 당나라를 기회의 땅으로 알고 건너왔다. 장보고는 군에 입대해 무령군 소장에 올랐다. 1,000명 병력의 지휘권을 가진 직책이니 지금의 사단장 정도에 해당될 것 같다. 장보고의 원래 이름이 궁복(弓福)이었으니 활 쏘기를 비롯해 무술에 재주가 있어 군인으로 출세를 하게 된 것이다.
장보고의 눈길을 끄는 것은 신라출신 노예들이었다. 골품제라는 신분제도에 염증을 느껴 당나라로 건너온 장보고 자신도 해도인(海島人 섬놈)이라는 멸시를 받고 자라 신라출신 노예들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해도인이라는 신분은 주홍글씨처럼 평생을 따라다니며 그를 괴롭혔다.그는 자신의 관할지역에 신라출신 노예들을 직접 사서 해방을 시켰으나 그것은 일시적 미봉책에 불과했다.
828년 장보고는 군에서 제대했다. 군인이란 직업이 전란이 있을 때나 필요하지 평화 시에는 별로 할 일이 없는 직업이라 구조조정 차원에서 명예퇴직 한 것인지 장사(무역)을 하기 위해 자진해서 그만 둔 것인지는 불분명한데 아마 후자인듯하다.
삼국사기 “장보고. 정연전”에 828년 흥덕왕에게 요청해 군사 만명을 빌려 완도(청해)에 진을 차려 노예무역을 막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노예무역 근절뿐 아니라 해상무역의 근거지로 삼았다. 828년은 당나라에서 차(茶)를 처음 들여온 해로 공식 기록된 해다. “당나羅 사신으로 갔던 김대렴(金大廉)이 차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 기슭에 심었다”고 했는데 장보고가 해상무역기지를 차린 완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둘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보고의 공식직함은 청해진 대사다. 이것은 신라왕이 당나라 황제에게 ‘영해군 대사’라는 관직을 받은 것과 비교해 볼만 하다. 더구나 신라와 별도로 개평(開平)이라는 연호를 독자적으로 썼고 신라에 세금을 바친 것도 아니니 완도 일대는 장보고의 독자세력권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완도는 중국대륙과 한반도, 일본을 잇는 해상 요충지인데 1,200년 전 이곳에 진을 차려 노예무역을 근절하고 해상무역의 거점으로 삼은 장보고의 안목이 놀랍다. 더구나 당나라와 직접 왕래가 없던 일본은 장보고를 통한 중개무역으로 필요한 물품을 수입했다.
“돈을 벌려면 장사를 하라”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진리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화식열전(貨殖列傳)에도 그런 말이 있다. 해상중개무역으로 큰돈을 번 장보고는 신라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산동반도에 법화원이라는 절을 세웠다. 이곳에는 신라인들이 집단 거주한 신라방, 신라인들의 자치행정기관인 신라소가 있었다. 신라인들은산동성, 강소성에 집단거주하며 해상무역에 종사했다. 법화원은 현재 산동성위해시(威海市)에 있다.
한,중,일에 이름이 알려진 거상(巨商)이된 장보고는 노예무역을 하는 해적을 퇴치할 만큼 군사력도 지녔다. 반면 신라는 계속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중앙에서는 정변이 계속되어 왕이 신하에게 살해되는 일도 있었다. 흥덕왕이 죽고 희강왕(43대)이 왕위에 올랐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왕이 죽으면 장자가 왕위에 오르거나 혹은 아들 중에 누군가 왕위에 오르는 게 상식인데 당시 신라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로 힘 있는 자가 왕위에 올랐다. 흥덕왕이 죽자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다. 왕의 5촌 조카 김제륭과 왕의 사촌동생 김균정 사이에 벌어진 싸움이다.
시중인 김명(金明)과 아찬(阿飡) 이홍(利弘), 배훤백(裵萱伯) 등은 김제륭을 받들고, 아찬 김우징(金祐徵)과 조카인 예징(禮徵) 및 김양(金陽)은 김균정(김우징의 아버지)을 받들어대궐에서 서로 싸우게 되었다. 결과는 김제륭편의 승리로 43대 희강왕이 되었다.
이 싸움에서 김균정은 죽고 김양와김우징은 완도로 도망가 장보고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 장보고로서는 싫던 좋던 진흙 밭에 한쪽 발을 들어 놓게 된 것이다. 희강왕은 고작 3년동안 왕 노릇하다 김명, 이홍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왕위에 오를 때 같이 싸우던 자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왕위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생각해 왕은 자살했다.
희강왕이 자살하자 김명을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니 민애왕(44대)이다. 민애왕은 약 1년 정도 왕 노릇했다. 청해진으로 숨어든 김우징, 김양은 김명이 왕이 되었다 소리를 듣고 장보고의 도움으로 군사를 일으켜 광주를 공격하고 남원을 점령했다. 김양은 무주 철야현(현재 나주)까지 병력을 이동시켰다. 민애왕은 김양의 군대를 요격했으나 오히려 전멸 당했다. 기세가 오른 김양의 군대는 달구벌(대구)까지 진출했다.
민애왕은 왕의 친위대인 금군까지 동원했으나 김양의 군대를 당할 수 없었다. 정예군인 금군까지 격파 당하자 민애왕은 별궁으로 숨었으나 김양에게 발각되어 죽었다. 왕을 죽이는 것을 시역이라 하여 왕조국가에서는 금기사항인데 당시 신라에서는 시역이 밥 먹듯 일어났으니 그쯤 되면 나라 문 닫는 것이 차라리 낫다.
민애왕이 죽자 김우징이 왕위에 올랐으니 45대 신무왕이다. 신무왕은 장보고 덕에 목숨을 부지했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으니 장보고 신세를 톡톡히 진 것인데 “신세를 지면 자유를 잃는다” 했다. 신세를 갚기 위해 장보고에게 감의군사라는 직책을 내리고 식읍 2천호를 주었다. 그리고 장보고 딸을 태자비로 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