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그리고 제자들(1)
퇴계선생과남명선생은 같은 시대를 살다 간 유교의 양대 산맥으로 두 분은 1501년 같은 해에 태어나 세상을 떠난 것은 퇴계 선생이 2년 먼저다. 조선 정신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친 퇴계와 남명은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 남명은 실천과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퇴계는 예(禮)와 인(仁)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퇴계는 매사에 조심하며 순리대로 살아가는 태도를 취했고 남명은 남의 눈 의식하지 않고 소신대로 살아갔다. 그래서 남명은 당시 금기였던 문정왕후를“궁궐에 사는 일개 과부”라고 대놓고 비판했다. 남명은 “내가 평생에 잘한게 있다면 죽으면 죽었지 구차하게 남의 뒤를 따라 다니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배워서 이치를 깨달았으면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는 남명은 공리공론만 일삼는 당시 선비들을 가리켜 “물 뿌리고 청소하는 법도 모르면서 진리를 다 깨달은 양 떠드는데 참 무식한 소치”라고 비판했다.
실천과 의리를 중하게 여긴 남명의 제자들 중에서 임진, 정유왜란 때 의병장이 많이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禮)와 인(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퇴계는 남명을 일러 “오만하여 중용의 도를 잃었다”고 말했다. 퇴계는 현실과 타협하지는 않았으나 현실을 인정해 남명처럼 비판 일변도가 아니라 때로 조정에 출사해 현실정치에 참여했다. 그래서 제자들 중에는 김효원, 김성일, 유성룡 등 조선 중기 정치인들이 많아 동인, 남인의 뿌리를 이룬다.
특히 퇴계의 제자 박소임은 벼슬을 하지 않고 평생 후진양성에 힘을 써 그 제자들이 서인, 북인계열에도 참여해 퇴계는 사조(師祖)로서 정파에 관계없이 존경 받는 스승이 되었다.
퇴계와 남명의 성격을 나타내는 일화가 있다. 어떤 선비가 남명을 찾아가 여자의 성기에 대해 물었다. 남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선비는 남자의 성기에 대해 물었다. 남명을 제자를 불러 “저 자를 내쫓으라” 했다.
선비는 이번엔 퇴계를 찾아 가 여자의 성기에 대해 물었다. 퇴계는 “步藏之者而寶而不市者也”라고 말했다. 그러자 남자의 성기에 대해 물었다. “坐藏之者而刺而不兵者也“ 선비가 듣고 보니 명답이었다. 뜻이 궁금한 분은 옥편을 찾아보거나 인터넷에서 검색 해보기 바란다.
퇴계와 남명은 동 시대를 살면서 성향이 다르고 세계관이 다르고 활동무대도 퇴계는 안동을 중심으로 경상좌도 남명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경상우도로 갈라져 제자들도 라이벌 의식이 강했다. 퇴계와 남명은 학문의 라이벌로 선의의 경쟁을 했으나 제자들까지 선의의 경쟁을 한 것은 아니었다. 경쟁이 선의의 경쟁이 되면 좋겠으나 세상에는 선의의 경쟁보다 상대를 죽이고 나만 살겠다는 악의를 바탕으로 한 경쟁이 더 많다.
선조 2년 4월19일 기사에 선조와 기대승이 논어 이야기를 하다가 억울한 옥사로 화제가 바뀌는 것이 나온다. 당시에는 천재지변이나 기상이변이 억울한 사람의 한이 맺혀 생기는 것으로 이해했다. 기대승은“일기가 수상해 강원도에는 눈이 오고 평안도 황해도에는 우박과 눈이 내렸습니다.”
음력 4월중순이면 양력으로 5월중순-5월말인데 눈, 우박이 온 것이다. 이것을 기대승은“혹시 억울한 옥사 때문이 아닐까?”라고 진언한다. 선조는 “억울한 옥사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기대승은“억울한 옥사가 한 두 개가 아닐 테니 해당 부서에서 조사해봐야 알겠지만 예를 들면 하종악의 옥사가 있다.”라고 말을 꺼낸다.
하종악의 옥사는 간통사건인데 기대승은“간통사건이 가장 어려운 사건”이라고 말한다. 은밀하게 행해지는 일이니 증거 불충분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선조는 “그 사건은 내게 보고서가 올라와서 앞부분만 조금 읽어봤는데 사실인 듯 하다.”라고 말한다.
하종악이 누구일까? 하종악은고려 충신 하공진을 시조로 하는 진주 하씨로진주일대에서는 알아주는 명문가 자제다. 하종악은남명 조식의 문인(文人)으로진사과에 합격했는데 부인이 죽었다.
남명 선생이 쓴 지리산 여행기 유 두류록(遊頭流錄 옛날에는 지리산을 두류산이라 부르기도 했다)에 하종학이 지리산 일대를 여행하는 남명 선생 일행을 두 번 찾아오는 장면이 나온다. 그 때가 1558년(명종13년) 4월로 그 때 이미 하종학은 진사과에 합격한 후였다.
부인이 죽어 재혼을 했는데 재혼 상대는 이인형의 손녀, 이영의 딸 이씨였다. 이인형은 대사헌, 한성부윤을 지낸 인물로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중종 때 복권되었다. 하종악과 부인 이씨는 나이 차이가 많았으나 이씨는 남편을 정성껏 섬겼다. 그러나 이씨가 28세 되던 해 하종악이 이름 모를 병을 앓다 죽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이 심한 스트레스 받을 때가 가족을 잃었을 때이고 특히 배우자를 잃었을 때 느끼는 스트레스가 극심한데 조선시대 여자들이 남편 잃었을 때 느끼는 스트레스는 지금 보다 몇 배 심했고 문제는 그 스트레스가 평생 지속된다는 것이다.
배우자가 죽었을 때 남자는 남들 앞에서 웃을 수는 없고 “변소에서 웃는다” 했다. 왜? 새 장가 갈 생각에. 그러나 조선시대 여자들은 남편이 죽으면 변소에서도 울어야 했다. 왜? 평생을 고독과 싸우며 혼자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배우자가 죽었을 때 남자에게는 재혼이 보장되고 여자는 혼자 살아야 한다는 것은 대단히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일이나 조선시대 문화나 풍속이 그랬으니 조선시대에 여자로 태어나지 않을 것을 감사하며 살 일이다. 더구나 이씨처럼 28세 한창 나이에 재혼은커녕 남자친구도 없이 혼자 살아야 한다는 것은 죽는 것만도 못한 형벌이다.
평민들은 재혼을 해도 큰 흉이 아니지만 양반가문 여자가 재혼 한다는 것은 금기였다. 남자 생각을 해도 안되고 남자와 말을 해서도 안 된다. 이씨는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여 혼자 살 결심을 했다. 이씨는 집안의 남자 종들과도 이야기를 하지 않고 지시할 일이 생기면 여자 종을 불러 대신 말을 전하게 했다.
하종악 집안은 진주의 명문가이고 갑부라서 남긴 재산도 많았다. 하종악에게는 딸이 있었는데김려와 결혼했다.김려도남명 조식의 문하의 선비였다. 하종악의 딸은 서모에게 친정 재산이 넘어가는 것을 분하게 여겨 재산을 차지할 생각을 해 이씨가 간통을 했다고 소문을 냈다.
양반가문의 여자가 수절을 못하고 간통을 하면 사형을 당하거나 유배를 가는데 그렇게 되면 재산은 자녀들에게 돌아가니 그것을 노린 것이었다. 이씨의 간통 소문에 진주목사는 이씨를 불러 조사를 했다. 하종악과김려 모두 남명 조식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고 하종악이 진주 일대에서는 알아주는 가문이니 진주목사로서는 그냥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씨는 간통 사실을 완강하게 부인했다.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나 반듯하게 교육 받은 이씨는 꼿꼿한 성격에 있지도 않은 간통 사실을 시인하라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부사는 무슨 말씀을 하는 게요? 내가 집안의 남자 종들과 얼굴도 마주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말 한 마디도 나누지 않는데 간통 이라니?”
증거도 없는 사건에 양반집 부녀자를 고문 할 수는 없다. 진주목사는 만만한 종들을 불러 고문하며 자백을 강요했으나 종들도 있지도 않은 사실을 자백할 수는 없었다. 이씨의 간통 사건은 “혐의 없음”으로 종결 되었다. 그러자 진주일대 선비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하종악과 동료, 친척으로 얽힌 사이로 특히 정인홍, 하항, 이희만 등이 경상감사에게 간음한 이씨 처벌을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