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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93주년 3.1절
종로4거리 보신각. 무심하게 지나다니던 곳이지만 3.1운동 때 보신각 앞에서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른 유서 깊은 장소다. 명월관 지점인 태화관(조계사 건너편)에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탑골공원, 보신각 앞, 승동교회에서는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계동 중앙고등학교 안에 있는 삼일기념관. 3.1운동 당시 학교 숙직실이었다. 동경 유학생 송계백이 선배 현상윤(중앙고보 교사)을 숙직실로 찾아온 것이 시작이었다. 현상윤은 송계백의거사 계획을 듣고 교장 송진우 와 친구 최남선에게 알렸고 송계백과 함께 보성고등학교(보성고보) 교장이던 최린에게도 알렸다. 중앙고보 숙직실은 삼일운동의 산파역을 했던 곳이다. 
1차대전이 끝나고 전후 처리를 위해 전승국들이 모여 회담을 가진 것을 역사에서는 “파리 강화회의”라고 한다. 1919년 1월18일 개최되어 1920년 1월21일까지 간격을 두고 진행된 마라톤 회의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천명한 것이 바로 파리 강화회의로 “피지배민족(식민지나 점령지역)에게 자유롭고 공평하고 동등하게 자신들의 정치적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자결권(自決權)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피지배민족은 이 원칙에 고무되어 너도 나도 독립의 꿈에 부풀었으나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패전국 식민지에 해당되는 원칙일 뿐인 “제국주의의 기만적 원칙”이었다. 파리 강화회의 소식을 들은 신한청년당 당수 여운형은“조선의 독립 및 장래를 결정지을 중요한 기회”라고 생각해 김규식을 파리로 파견하였다.
파리의 전승국 대표들은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일본 식민지에서 온 독립운동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중국은 대표를 파견해 서구열강에 갈갈이 찢긴 산동반도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패전국 독일 조차지만 소유권이 독일에서 일본으로 넘어갔다. 조국 독립의 부푼 꿈을 안은 베트남의 호지명도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했으나 말도 꺼내지 못하고 회의장 복도에서 쫓겨났다. 참고로 일본이나 프랑스는 1차대전 전승국이다.
하여튼 민족자결주의는 피지배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주었다. 여운형은 상해에게 만주 길림으로 가 조소앙, 신채호, 이동녕, 안창호, 김좌진 등 만주, 러시아일대의 독립운동가 39명을 규합해 대한독립선언을 했다. 그때가 1919년 2월1일로 3.1운동 한달 전이다. 이것을 무오독립선언이라 하는데 음력으로 1918년(무오년) 12월이기 때문이다. 선언문 작성은 조소앙이 했다.
대한독립선언(무오독립선언) 1주일 후 일본의 심장부 동경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을 했다. 이것을 2.8선언이라 한다. 조선 청년독립단 명의로 발표된 독립선언 서명자 11명 중에는 이광수가 들어 있어 이채롭다. 나중에 일제에 협력한 변절자 이광수도 당시 27세 청년 독립지사였다.
민족자결주의, 대한독립선언(무오독립선언), 2.8선언으로 독립에 대한 열망이 무르익을 무렵 고종황제의 승하로 조선민중들의 반일감정이 높아졌다. 황제가 일본에 의해 독살되었을 것이라는 풍문이 퍼졌다.
건강하던 황제는 식혜를 마시고 30분 만에 경련을 일으키며 쓸어졌다. 내관들과 함께 시신을 염하던 민영달이 황제의 치아가 다 빠지고 혀가 닳아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황제의 시신이 부풀어 올라 바지를 찢어 벗겨야 했다. 이런 정황이 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근거로 제시된다.
황제의 인산(국장)는 3월3일이었다. 국내외적 요인에 겹쳐 황제의 인산을 앞두고 종교단체와 학교를 중심으로 시위준비에 들어갔다. 경향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올라오는 국장 때 만세운동을 시작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일제는 조선인 사회단체를 많이 해산 시켰으나 종교단체와 학교는 비교적 활동이 자유로웠다. 종교단체에서는 조직력이 좋은 천도교와 기독교가 활발하게 움직였다.
천도교와 기독교는 개별적으로 움직이며 만세시위를 준비하다 서로 활동상황을 알고 대동단결하여 하나의 조직체로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기미독립운동(3.1독립운동)은 천도교, 불교, 기독교 등 종교연합체가 대중을 이끈 독립운동으로 종교인들의 역할이 컸다.
천도교 측의 손병희, 오세창, 최린, 권동진 등은 1월5일부터 49일동안 진행되는 연성기도회 동안 독립운동 3대원칙 대중화(大衆化), 비폭력(非暴力), 일원화(一元化)를 정하고 거족적 독립운동을 천도교 단독으로 거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대한제국 전직 관리 등 저명인사에게 합류를 권유하였으나 모두 거절했다.
천도교 측에서는평안도 기독교계 거목인 남강 이승훈에게 연락을 했다. 이승훈은 즉시 상경해 신익희, 송진우 등을 만나 천도교와 기독교의 합류에 찬성하고 평안도로 내려가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했다. 기독교 측에서는 평안도를 중심으로 장로교가 경기도를 중심으로 감리교가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승훈은 서울에서 활동하던 기독청년단 간사 박희도목사를 만나 장로교와 감리교가 공동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2월21일 최남선이 이승훈과 함께 최린 집을 찾아가 종교를 초월하여 민족을 위한 독립운동에 행동통일을 하기로 합의하고 천도교에서는 기독교에 자금 5,000원을 제공했다.
원래 지도부의 계획은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상경하는 황제의 인산에 맞춰 3월3일 거사를 하기로 했으나 국장일인 인산에 거사하는 것은 황제에 대한 불경이라는 의견이 있어 3월2일로 변경하려 했으나 기독교에서 3월2일이 주일이라 해서 최종 날자 가 3월1일로 결정되었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을 종교 별로 나누면 기독교 16인, 천도교 15인 불교 2인이다. 이들 민족 선각자 33인은 종교를 초월하여 민족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했다.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최남선은 선언서 기초이념이 기독교사상이었음을 증언했다. 감리교 목사 신석구는 독립선언서 서명을 제안 받자 20일간 새벽기도 후 서명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목사들 중 박희도, 정춘수처럼 변절하고 배신해 일제의 앞잡이가 된 목사도 많으나 신석구 목사는 감리교 목사로서는 드물게 변절하지 않고 신사참배도 거부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일본 제국주의 강제병탄 9년만에 일어난 대규모 독립운동은 일제로부터 독립을 이루는데 실패했으나 우리 민족 구성원 전체가 외세에 맞서 독립의지를 만방에 알린 의미 있는 운동이다. 3.1운동 서명자 33인의 대표 손병희는 경찰 조사에서 “운동이 성공했으면 어떤 나라를 세우려 했냐?”는 질문에 “백성의 나라를 세우려 했다”고 답변했다.
민족대표들은 백성(국민)이 주인이 되는 주권재민의 공화국을 꿈꾸고 있었다. 그 동안의 국권회복운동은“대한제국의 부활”에 있었는데 3.1운동은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 개념의 새로운 지평을 연 독립운동이다.
이런 선열들의 독립의지와 역사성을 무시하고 정부수립일 1948년 8월15일을 건국절로 각색해 자신들의 부끄러운 친일 부역행각을 감추려는 자칭 보수 뉴라이트가 있다는 것을 3.1절을 맞이하며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기사 등록일: 2012-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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