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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잔인한 달 4월에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시인 엘리오트는 황무지 제1부 죽은 자의 매장에서 “4월을 잔인한 달”이라 했다. 황무지가 나온 지 40여년이 지난 1969년 Deep Purple은 연주 시간 12분의 대작 “April”을 발표했다. 클라식을 연상하게 하는 대작April에서 Deep Purple은 “햇빛이 비출지라도 4월은 잔인한 계절”이라고 했다.
Deep Purple의 4월은 Elliot의 황무지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라고 하는데 하여튼 엘리오트나딥퍼플의 표현을 빌지 않아도 4월은 잔인한 달이다. 의미는 다르지만.
내가 복학을 한 74년 4월의 대학가는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쿠마의 무녀(巫女)처럼 생명력을 잃은 4월이었고 부활을 약속 받은 축복의 계절에 마지못해 생명을 이어가는 잔인한 운명의 4월이었고 그 부활의 축복은 저주받은 축복이었고 딥퍼플의 4월 가사처럼 세상은 그림자 속으로 서서히 사라지는 4월이었다.
대학가가 공허하고 황폐한 황무지로 변한 것은 긴급조치라는 괴물때문이었다. 그 해 1월부터발동하기 시작한 긴급조치는 4월4일 4호까지 발동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철폐, 민주화 요구하는 모든 시위를 북한의 사주를 받은 용공주의자들의 국가전복으로 책동으로 간주해 단칼에 날려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문교부장관 민관식은 TV에 나와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 계급투쟁 및 노동자 농민 궐기를 선동하는 등 북괴와 동일한 주장을 하면서 공산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기도했다”면서반대=빨갱이, 민주화 요구=공산혁명이란 등식으로 사회 분위기를 잡아나갔다. 이것은 다가올 비극의 전주곡이었다.
제대 하고 보니 유신반대운동은 생각보다 광범위하고 치열했다. 함석헌 선생, 백기완 선생 같은 재야 명망가들도 유신반대운동에 앞장 섰다. 생리적으로 조직에 속하는걸 싫어하는 나는 복학하기까지는 그냥 자유인으로 지내며 관망하고 싶었다.
군이라는 조직에서 빠져 나온지 얼마 안 되“무엇을 하던 복학 후”로 미뤘다. 그래서 민청학련이라는 큰 태풍을 피했는데 그게 잘된 것인지 아닌 것인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복학을 한 나는 외톨이었다. 친구도 없고 의논 대상도 없이 고작 선, 후배 2-3명과 종로5가 기독교 회관 드나들며 앞날을관망하고 있었는데 검거 선풍이 불며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기독교회관 나가는 것도 그만 두었다. 74년 4월은 피할 수 있는 붉은 바위 그늘조차 없이 황량했다.
4월이 채 지나기도 전인 4월25일, 신문들은 “폭력혁명으로 로농정권 획책”이란 제목으로 민청학련 사건의 시작을 알렸다. 사건 전모의 발표는 신직수 중앙정보부장(당시)이 했다. 정부에서 민청학련 행동총책으로 지목 된 이철 전의원은 당국의 집요한 추적에도 잡히지 않고 피신하다 고등학생 복장으로 사직공원 앞에서 검거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아쉬운 탄성을 자아냈다.
간첩 신고하면 포상금 30만원 주던 시절에 이들 수배자에게 걸린 현상금이 200만원이었으니 당국에서 민청학련 주모자 체포에 얼마나 혈안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긴급조치에 이어 민청학련, 인혁당 사건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은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화룡점정이었다. 즉, 유신반대, 민주화 요구를 하는 학생, 재야세력을 한방에 보낼 수 있는 작업이었다. 74년 초부터 시작된 검거선풍으로 학생조직은 거의 와해 상태였다. 74년 4월3일 동숭동 서울 문리대에서 벌어진 유신반대 시위가 그것을 말해준다.
지도부가 검거 되거나 피신한 상태에서 벌어진 시위는 시위라고 하기엔 싱겁기 한이 없었다.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보다 경찰과 사복이 더 많았으니까. 바로 그날 밤 긴급조치 4호가 나왔다.그 당시 학생 시위라는 게 훈방이나 고작해야 귀싸대기 몇 대 맞고 구류 며칠 살다 나올 성질의 것인데 긴급조치 4호로 징역 5년에서 사형까지 언도 하게 한 것은 박정희 정권이 작심을 한 것이었다.
사형언도를 받았던 유인태씨의 말에 의하면 “처음에는 인혁당 학원 담당책 여정남에게 지시를 했다고 자술서를 쓰라고 하더니 얼마 후 여정남으로 지시를 받았다고 쓰라고 했다.”“ 그 사람이 서울에 있는 학교 사정도 잘 모르는데 무슨 지시를 받습니까?”“아, 새끼야 그렇게 쓰라면 써. 너 보다 나이 많고 선배잖아.”
모두 다 잘 알다시피 1,024명이 조사를 받고 긴급조치 4호 위반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240명이 구속되었다. 7월13일 비상보통군법회의는 유인태 이철 등 6명에게 사형을 황인성, 정문화 등 7명에게 무기징역등 사건 관련자 모두를 중형에 처했다.
특히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이 언도된 8명은 이듬해 4월8일 대법원(대법원장 민복기)의 확정 판결로 사형이 확정되었다. 8명은 대법원 확정판결 후 20시간만에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인혁당 사건은 20세기에 일어난 사법살인으로 국제법학자회((International Commission of Jurists)는 4월8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정했다.
가족들은 사형 집행된 사실도 뉴스를 통해 알았다. 가족들에게는 시신도 인도 되지 않았고 화장한 가루가 인도 되었다. 고문 당한 흔적이 있는 시신을 가족들에게 인도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인혁당 사건이 고문과 조작에 의해 각색된 사건이라는 것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 언도된 사람들이 형 집행정지로 줄줄이 석방된 것에서 알 수 있다.
변론은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는 “정상적으로 재판이 진행되었으면 반공법 위반으로 2-3년 살다 나올 사건”이었다고 술회했다. 억울하게 사형당한 8명 중 한 명인 우홍선 열사의 부인 강순희씨는 “남편이 사형당한 이후 신문에 나오는 박정희 사진을 그가 죽을 때까지 약 5년간 이가 아프도록 꼭꼭 씹어서 뱉곤 했어요”라고 말하면서 남편 산소에 매주 꽃을 들고 찾아가서 ‘살인마 박정희 천벌을 받으라!’라고 외쳤다고 한다.
인혁당 사건은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났거니와 8명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확정판결에 참여했던 대법원 판사 한환진씨는 당시에는 판결문을 못 보고 30년도 더 지나 재심 때서야 판결문을 처음 봤다고 실토해 사람들을 황당하게 만들었다. 대법원 판사가 판결문을 읽지도 않고 단순히 거수기 노릇만 한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이 생겼던 것이다.
2007년 1월2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인혁당 사건 재심 선고공판에서 피고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 해 8월21일 재판부는 국가에 245억 배상을 판결했다. 75년 4월이 지나고 32년 만이었다. (오충근 기자)

기사 등록일: 2012-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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