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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그 해 5월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피살 된 1979년 10월26일 이후 국민들 사이에 생겨났던 “민주 정부 수립”의 열망은 실질적으로 12.12로 끝났다. 박정희의 5.16 쿠데타가 사전 치밀한 계획으로 일거에 권력을 장악한 쿠데타라면 전두환은 12.12부터 시작해 다단계로 쿠데타를 시도해 5.17로 권력을 잡았다.
12.12를 통해 권력에 접근한 신군부는 정치 참여를 정당화 하려는 여론조작을 했다. 대표적 여론조작으로 북한을 이용한 “남침설”이 있다. 남북이 대치하는 한반도는 분단 이래 상호 협력, 평화공존을 바탕으로 통일을 지향한 기간은 매우 짧고 상호 정치적 필요에 의한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80년 5월에도 그랬다. 신군부는 80년 5월 북한 남침설을 조작해 흘렸다.
남침설은 중앙정보부 쪽에서 흘러나와 5월12일 국무회의에 보고 되었으나 육군 정보참모부는 “남침설”을 가치 없는 정보로 판단했다. 위컴 주한미군 사령관(당시)은 “남침설”에 대해 근거가 없으며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려고 일부러 흘리는 정보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미 국무부도 “남침설”에 대해 어떤 정보도 갖고 있지 않다고 발표했다. 훗날 “남침설”의 진원지로 알려진 일본 내각조사실 한반도 담당자도 “그런 정보를 말한 적도 없었다”며 부인해 “남침설”은 신군부가 조작한 것이 밝혀졌다.
청와대를 차지하려는 신군부의 반대세력은 학생들과 3김을 비롯한 기존 정치인들이었다. 80년 5월의 화두는 정치일정 단축과 계엄해제로 80년 새해부터 국민들이 요구하던 2가지 사항이었다. 이 같은 요구에 전두환은 2월20일 “합동수사본부장 일이 벅차 어서 계엄이 해제되었으면 좋겠다.”고 연막을 치면서 4월14일 정보부장 서리에 취임했다.
신군부는 일찌감치 소요사태 진압을 구상해 2월 원대복귀 시켰던 20사단을 포함해 공수여단을 비롯해 충정부대를 지역별로 배치했다. 20사단은 충정부대로 나중에 광주에도 투입되는데 전방 전투사단을 포함해 전투력이 뛰어난 부대다. 전남 북에는 전투교육사령부 작전통제하에 31사단, 35사단, 7공수 2개 대대 투입 계획을 세우고 2군 사령부는 해병 1사단 예하 2개 연대를 작전통제 해 부산, 대구, 광주의 시위진압에 투입하기로 했다. 그러나 해병대는 광주에 투입되지 않았다.
국회에서는 개헌, 정치일정, 계엄해제가 논의되고 있었다. 신민당은 계엄을 유지할 명분이 없다면서 계엄해제 촉구안을 제출했다. “계엄해제” “민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학생시위도 정부가 해결해야 할 몫이었다. 학생들의 눈에는 전두환과 신군부가 민주정부 수립에 방해물로 보였다.
학생시위에 대해 정치권에서는 정부가 성의있는 조치를 내려야 하고, 시위를 물리력으로 해결하려 해서는 안되고, 학생들도 자제해야 할 것이라고 원칙을 내놓았다. 학생들도 5월15일 서울역 앞 대규모 시위를 기점으로 “민주정부 수립을 원치 않는 세력에게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시위를 자제하기로 했다.
그러나신군부는 계엄해제는커녕 오히려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하고 정치인들은 부정부패와 소요사태 배후인물로 지목해 체포할 계획을 세우고 학생시위는 물리력으로 해결하겠다는 계획을 세워놓았다.
당시 언론은 중동순방 중인 최규하 대통령이 귀국하면 시국해결책이 나올 것이라고 전망했으나 5.16을 경험한 국민들은 최규하 대통령은 바지사장에 불과하고 실권을 잡고 있는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신군부가 어떻게 될 것인지가 관심의 대상이었다.
한편 국회는 5월20일 임시국회를 소집해 계엄해제, 정치범 석방, 정치 일정 단축을 논의할 예정이었다. 신현확 총리도 정치일정을 단축해 연말까지 끝낼 것을 시사했다. 그러나 5월17일 밤 9시에 열린 비상국무회의는 모든 것을 날려버렸다. 무장한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이 포위한 중앙청에서 열린 국무회의는 찬반토론 없이 비상계엄을 통과시켰다.
김대중은 소요사태 배후인물로 체포되고 김영삼은 가택연금 되었다. 김종필은 불명예스럽게도 권력형 비리로 체포되었다. 5월20일 열릴 임시국회는 수도경비사령부 30단 병력이 국회를 포위하고 국회의원 등원을 막아 열리지 못했다. 대법원에서 김재규 사형확정 된 것도 5월20일이다. 김재규는 4일 후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5월18일 광주에서는 산발적 시위가 있었다. 17일 비상계엄확대와 김대중 체포 소식을 들은 학생들 500-600명이 오후 5시경 도청부근에서 시위를 하다 공수부대가 돌진하자 뿔뿔이 흩어졌다.
오후 7시경 청년, 학생들 몇 백 명이계림동 광주고등학교 부근에서 공수부대와 대치했으나 힘에 밀려 해산 당했다. 밤 8시경 금남로에서 학생, 시민들 약 600명이 시위를 하다 공수부대 진압작전 10분 만에 해산 당했다.
그러나 시위격화 여부에 관계없이 이미 예정된 공수여단 축차투입 계획에 따라 3공수가 진압부대로 광주로 내려가기로 되어 있었다.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3공수를 11공수로 교체해 줄것을 요청 후 동국대학교에 주둔하고있던 3공수를 방문해 “7공수가 시위진압에 고전을 하니 광주로 내려가라”고 지시했다.
이것은신군부가 광주를 어떻게 혼내 줄 것인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18일-27일 벌어진 항쟁에서 공식 사망한 민간인이 167명이다. 그러나 당시 언론은 사망 17명으로 보도했다. 보도관제로 광주소식이 외부에 최초로 알려진 것은 5월21일로 그날 경향신문은 3일간 소요사태로 민간인 사망 1명, 군경 사망 5명, 민간인 부상자 미상으로 발표했다.
항쟁의 원인을 극렬분자, 북한의 사주, 깡패 양아치 등의 사회불만세력의 난동으로 보도해 광주항쟁이 신군부의 보도관제에 의해 어떻게 얼마나 축소 왜곡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항쟁기간 중 진압군을 지휘 통제한 전투교육사령부는 항쟁 직후 광주시민들의 죽음을 불사한 항쟁의 원인을 군의 시각에서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해산보다는 체포 위주로 협공, 소요진압간 지역주민이 보는 가운데 폭동군중과 격렬한 충돌 발생, 도피군중을 추적•체포하는 과정에서 기물파괴, 가족위협에 대하여 시민들의 감정 폭발. 소요진압 중 발생된 사상자 및 체포자의 처리 지연과 장기간 노상방치로 주민들의 감정 촉발"
10.26 이후 미국은 한국에 평화적 방법으로 민간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지지했으나 신군부의 정치개입을 적극적으로 제지하지도 않는 이중 정책을 썼다. 신군부는 5.17 계엄확대를 2시간 전에 미국에 통보했다. 일부에서는 미국이 계엄확대를 조종했다고 주장하나 사실이 아닌 듯하다.
5월18일 글라이스틴 대사가 최규하 대통령을 방문해 계엄확대와 정치인 구금이 “충격적이고 경악할 일”이라고 항의했다. 그러나 광주항쟁 기간 중 공수여단의 무자비한 탄압에도 침묵했고 연합사 병력 일부를 항쟁 진압에 동원하는 것을 승인했다.
이런 미국의 이중적인 태도를 미국이 광주항쟁 진압을 묵인 방조, 조종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 반미주의자들이 미 문화원 방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폭력과 억압이 있는 곳에는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그리고 그 의지가 당장 승리하지 못한다 해도 희생을 무릅쓴 인간들의 역사가 관념이 아닌 현실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기사 등록일: 2012-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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