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안내   종이신문보기   업소록   로그인 | 회원가입 | 아이디/비밀번호찾기
기자수첩) 삼일절을 맞으며
▣ 에필로그

이번 주 금요일이 3.1절로 우리 선조들이 국권을 빼앗긴지 9년만에 조선 독립을 외친지 94년 되는 날이다. 몇 년 전 초, 중고등학생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40%가 3.1절의 의미를 모른다는 결과가 나와 충격을 주기도 했다. 우리가 비록 조국을 떠나 캐나다에서 캐나다 시민권을 갖고 산다 해도 문화적으로 혈통적으로 한국인이니 3.1절을 맞아 그날을 되돌아 생각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나치 선전장관 괴벨스는 “우리가 어떤 지역을 점령하면 3가지 부류의 사람으로 나누어진다. 우리에게 저항하는 저항세력(레지스탕스), 협력하는 협력세력(콜라보), 중간에서 머뭇거리는 대다수의 일반 대중이다. 그 나라 국민들이 자신들의 부가 약탈되는 것을 참고 견디게 하려면 머뭇거리는 대중들이 저항세력 편에 서지 않고 협력세력 편에 서게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일본이 조선 침략의 야욕을 나타내자 괴벨스가 말한 현상이 일어났다. 일제의 야욕에 저항하는 세력이 생겼다. 그런가 하면 일제에 협력하는 매국세력이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이것도 저것도 아닌 민중들이 있었다.
나라가 망했다고 세상까지 망하는 것은 아니다. 나라가 망했을지언정 배 고프면 먹어야 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 벌이를 해야 하고 청춘 남녀는 때가 되면 시집 가고 장가 가고 사람들은 바둑 장기도 두고 영화관에도 가고 술도 한잔 할 일이 생긴다. 나라가 망했어도 일반 민중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라가 망했다는 사실은 가슴 깊이 화인(火印)이 되어 잊을 만 하면 다시 되살아나는 상처가 되었다.

▣ 독립을 염원한 사람들, 저항세력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국권회복을 위해 저항세력은 의병을 조직해 무력항쟁을 일으켰다. 병오창의, 을미의병, 을사의병 등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의병들의 무력항쟁은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항일무장독립투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의병들의 무장항쟁은 왕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구한다는 충군구국(忠君求國)의 전 근대적 봉건적 생각에서 비롯되어 민족국가 개념의 애국적 항일무장독립투쟁과는 이념에서는 차이가 있으나 제국주의에 맞서 약소국이 무장투쟁을 벌린 것은 높게 평가되어야 하는데 의병들의 무력항쟁은 저평가 되어 있다.
무력항쟁은 1910년 경술국치 후 일제의 잔혹한 진압으로 대규모 항쟁 대신 소규모 비밀결사 식의 항쟁이 주류가 되었다. 국내 국외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는 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 대한독립의군부, 권업회, 등이 있다. 독립운동단체는 국내보다 국외에서 활발한 행동을 했다.
예를 들면 상해에서 결성된 신한청년당은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서를 전달하고 1차대전 종결을 위해 열린 파리 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해 독립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범진, 이범윤 형제는 외교적으로 군사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했다. 러시아 공사 이범진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강탈당한 후에도 외교업무를 계속하며 아들 이위종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 시켜 일제의 국권찬탈을 고발했다. 이준, 이상설과 함께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되었던 이위종은 그 후 러시아 장교로 1차대전에 참전했다 동부전선에서 전사했다.
이범진은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전 재산을 정리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내고 고종 황제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낸 후 권총으로 자살했다. 이범진의 자살에 대해 서울 주재 러시아 총영사 소모프는 “적들(일본)에게 가장 확실한 복수를 했다”고 그의 자살을 평가했다.

▣ 일제에 협력한 매국세력, 꼴라보(Collabo)

꼴라보는 프랑스어로 협력자라는 뜻인데 특히 나치 협력자를 가리키는 경멸의 뜻이 담겨있다. 일제에 협력한 매국세력으로는 일진회가 있다. 일진회는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황제가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하자 황제 퇴위를 재촉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사살하자 “조선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일본과 합방해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발표에 의하면 1904년 러일전쟁부터 1945년 해방까지 친일행각을 한 단체가 일진회를 포함해 65개에 이른다.
1919년 기미독립선언(3.1절) 당시 조선 총독은 하세가와 요시 미치(長谷川好道)로서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와 함께 무단통치를 했다. 두 사람 모두 하급무사 아들로 태어난 공통점이 있다. 안중근 의사 손에 죽은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도 하급무사 아들로 태어나 하급무사 생활을 했다. 특히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조선을 무력통치 하며 “일본 신민이 되던가 죽던가 하라”고 조선 민중을 억압했다.
친일단체 중에서도 악질적 친일 단체로 3.1운동 자제단 과 간도특설대가 있다. 1차대전이 끝나고 약소민족 독립이 대세가 되자 조선에도 독립 열풍이 불었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총독 하세가와 요시 미치(長谷川好道)는 무력으로 막는 것은 한계가 있고 부작용이 크다 생각해 유화정책을 생각했으니 바로 꼴라보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박중양, 이진호 친일 매국노들이 앞장 서서 만세 자제단을 만들었다. 박중양은 단장이 되었다.
‘민간 유지들이 자발적으로 독립운동의 진정 방법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유혹하는 자를 검거할 것을 서약하게 만들자.’는 취지로 조직된 만세 자제단은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6일 대구에서 처음 만들어진 친일단체다.
이 단체 발기인으로는 윤필오 김병태, 민영은, 박기순, 서병조, 신석린, 윤석필, 이승칠, 이종국, 장상철, 정재학, 정해붕 등이 있다.
총독 하세가와 요시 미치는 조선 민중의 독립 열기를 막기 위해 강경책과 유화책을 번갈아 썼다. 그는 3.1운동을 효과적으로 진압했으나 제암리 기독교인 학살 등 무력진압이 비판 받아 해임 된 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간도특설대는 “조선 독립군은 조선인이 다스려야 한다”는 친일파 이범익의 제의로 설치된 대대규모의 특수부대로 일본군이 아닌 만주국군에 소속되어 주로 동북항일연군(1로군 지휘관 양정우), 팔로군 과 전투를 벌였다. 동북항일연군(조선인민혁명군) 1로군 지휘관 양정우는 1940년 4월23일 적들과 전투 중 영광스러운 최후를 맞았다.
간도특설대에는 백선엽, 김백일 등 약 150명의 조선청년들이 장교로 복무하며 독립군을 직접 탄압한 대표적 민족 반역 집단이다.
기독교는 처음에는 민족의 등불 노릇을 하며 국채보상운동을 전개, 민중 계몽에 앞장 서며 3.1운동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하며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했으나 1937년 지나사변(중일전쟁)을 계기로 신사참배, 전쟁 옹호 등 친일로 돌아섰다.
기독교에서도 친일 행위 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기는 아는지 1937년 이후 친일 행위는 쏙 빼고 3.1운동 참여, 주기철 목사 순교 등 항일에 관한 것만 교인들에게 선전하는데 자신의 과오를 역사 앞에 솔직히 고백할 줄 아는 용기가 진정한 용기다.

▣ 기미 독립선언의 역사적 의의

기미독립선언(3.1운동)은 단발성 사건이 아니라 그로부터 2개월 동안 1214회의 시위가 계속된 대규모 민중 시위였다. 3.1운동 배후에는 많은 원인들이 있지만 그 중 하나는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하게 된 신한청년당의 김규식의 주문이다.
“내가 파리 강화회의에 가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조선 독립을 요구할 터인데 서양사람들이 내가 누군지 알겠는가? 그들에게 내가 누구인지 알리려면 국내에서 무슨 일이 있어 알려져야 한다. 국내 들어가 시위를 주도하는 사람은 희생 당하겠지만 서구인들에게 조선의 실정을 알리려면 불가피한 일이다.”
고종황제의 승하도 기폭제가 되었다. 황제가 일본의 손에 독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조선 민중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황제의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50만명이 넘었다는데 이들 대부분이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3.1운동으로 민중들이 민족의식을 깨우치는 동기가 되었고 일제의 야만적 진압은 서양 선교사들과 서양인들이 일본을 부정적으로 보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조선이 야만국으로 일본의 통치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서구인들이 대세였으나 조선 민중의 독립 열망을 보고 인식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3.1운동을 계기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에서 민주공화정인 임시정부를 세웠다는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는 조선 민중의 독립의지를 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AP통신은 독립 선언문이 “정의와 인류애 이름으로 200만 동포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있다”고 보도했듯 3.1운동을 계기로 조선의 독립의지를 해외에 알리고 임시정부 수립으로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생겨 일제가 항복할 때까지 독립운동을 수행했으나 해방 후 친일파 득세로 임시정부가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폄하 축소된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기사 등록일: 2013-03-01
나도 한마디
 
최근 인기기사
  로또 사기로 6명 기소 - 앨버.. +4
  웨스트젯 캘거리 직항 대한항공서..
  성매매 혐의로 억울한 옥살이 한..
  버스타고 밴프 가자 - 레이크 .. +5
  캘거리 의사, 허위 청구서로 2.. +1
  캘거리 고급주택 진입 가격 10..
  주정부, 전기요금 개편안 발표..
  미 달러 강세로 원화 환율 7%..
  “주택정책 너무 이민자에 맞추지..
  캘거리 초미의 관심사, 존 Zo.. +1
댓글 달린 뉴스
  트랜스 마운틴 파이프라인 마침내.. +1
  캐나다 동부 여행-뉴욕 - 마지.. +1
  동화작가가 읽은 책_59 《목판.. +1
  버스타고 밴프 가자 - 레이크 .. +5
  캘거리 초미의 관심사, 존 Zo.. +1
  캘거리 존 Zone 개편 공청회.. +1
회사소개 | 광고 문의 | 독자투고/제보 | 서비스약관 | 고객센터 | 공지사항 | 연락처 | 회원탈퇴
ⓒ 2015 CNDrea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