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신론을 숭배하는 유신론적 기독교인들은 “살아있는 하느님”이란 말을 의미도 모른체 앵무새처럼 되풀이 한다. 다시 말해 유신론적 하느님에 심각하게 세뇌되어 있다. 인류사에서 인간 생물종은 필요에 따라 신(神)을 만들고, 그 신을 다양한 종교적 제도와 교리와 전통으로 덧칠했다. 특히 신이 마치 인간과 분리된 살아있는 존재인것처럼 인격을 부여했다. 종교사에서 그 하느님은 그런데로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 하느님은 인종차별, 성차별, 종교차별, 빈부차별, 생태계위기 등으로 인류사회에 분단과 혼돈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다행히도 과학혁명과 계몽주의 운동과 함께 인간의 이성과 지성이 확장되면서 유신론적 종교체제의 거짓과 은폐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그 하느님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21세기 과학시대에 어떤 모양으로라도 믿음체계의 유신론적 신(神)은 필요없다. 현대인은 그런 신(神) 없이도 선하고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유신론적 종교체제들은 더 이상 설득력과 신뢰를 잃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죽은 하느님과 죽음 후의 천국행표를 팔아먹고 있다. 안타깝게도 기독교 신자들은 여기에 속고 있으면서, 속는 줄도 모르고 십일조와 헌금을 바치려고 열심히 교회에 나간다. 따라서 교회는 바이러스 팬데믹으로 국가 전체가 생명의 긴급한 위기에 처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파렴치하게 집단적인 예배를 강행하는 무지함을 드러내고 있다.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 따르면, 인간의 온전한 삶과 건강한 생명은 하느님 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 하느님이란 인간을 위한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을 위해 희생당하고 사람답지 못하게 사는 것은 예수의 정신에 크게 위반되는 일이다. 예수는 성전종교가 숭상하는 하느님 즉 인간의 존엄성을 폄하하는 유신론적 하느님을 철저히 반대했다. 예수의 하느님은 믿는 객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살아내는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진리였다.
한편 현대교회는 유신론적 예수, 예수의 신성, 인격신론의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무신론자로 정죄한다. 교회는 참사람 예수, 역사적 예수를 거부하고 추방했다. 교회가 정죄하는 무신론자들은 교회에서 쫓겨난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살아내는 무신론자 기독교인들이다. 오늘날 인류사회의 모든 영역에 기초가 되고 있는 과학적인 우주진화 세계관에서 인격신론의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기적과 개입은 없다. 하느님 예수도 없다. 이 모든 것들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신(神) 없이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그리고 의미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과 잠재력을 본능적으로 지니고 있으며,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원초적으로 교회는 역사적 예수로부터 탄생했다. 따라서 기독교는 “예수기독교”가 되었어야 하는데 교회는 참사람 예수를 배반하고 엉뚱하게도 “교회기독교”가 되었다. 다시 말해, 예수가 죽은 후에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삶은 서서히 잊어졌으며 326년에 니케아 신조가 만들어지면서 참사람 예수는 교회에서 완전히 추방되었다. 그리고 성상의 자리에 앉은 하느님 예수가 교회를 차지했다. 지난 1700년 동안 교회는 만들어진 예수, 인격신론의 예수, 유신론적 예수를 팔아먹었다. 죽은 후 천국에 올라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뿐이라는 장사행위를 벌였다. 교회는 하느님 예수를 팔아 먹는 장사행위를 유대교 성전에서 배웠다. 그러나 참사람 예수는 그런 하느님 장사를 철저히 반대했으며, 그러한 유신론적 믿음체계를 회칠한 무덤이라고 질책했다. 예수는 성전의 하느님 즉 교회의 하느님을 반대하고 새로운 하느님의 의미를 가르치고 그대로 살았다. 예수가 죽은 후부터 오늘날까지 인격신론의 유신론적 종교체제(유대교, 기독교, 회교도)들은 세상을 평화롭게 안정시키기 보다 정치와 과학에 비상식적인 만행을 저지르고, 가정과 사회를 혼란과 분란에 빠트렸다. 유신론적 종교체제는 밝은 미래의 세상을 건설하는 일에 실패했다. 유신론적 종교는 사람들을 속여서 하느님과 내세를 팔아먹는 장사를 당장 중단해야 한다. 인간은 초자연적인 하느님 없이, 그런 종교 없이 선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260만년 전에 인간 생물종이 지구에 최초로 등장한 이래 장구한 세월동안 끊임없이 지속된 진화과정을 통해 인간뇌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했으며 지금도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과 지성은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자아의식을 지닌 현대 인간은 신(神) 없이, 신에 대한 교리적 믿음 없이, 인격신론의 종교 없이, 자율적이고 창조적으로 선(善)할 수 있고, 온전할 수 있다. 인류사에서 고대인들은 자신들의 삶을 지배하는 원칙들이 초자연적인 신에 대한 절대적인 의지에 근거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인간은 전지전능한 하느님을 만들고, 윤리의 원천으로 세웠다. 그리고 이 하느님이 인간들에게 율법들을 계시했다는 공식을 첨부했다. 물론 인간들이 율법과 교리를 만든 주요 목적은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또한 이 수단들로 사람들을 통제하고 착취하는 만행을 지절렀다. 이렇게 고대인들은 신화를 먼저 창조하고 이것에 따라 제도적인 종교와 전통이 탄생했다. 그러나 오늘날 21세기 우주진화 세계관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인격신론의 초자연적인 하느님과 유신론에 대한 종교와 신학은 낡은 생각이 되었으며 완전히 비상식적이다. 고대의 종교적 율법들을 신중하게 살펴보면, 그것들을 만든 사람들의 삼층 세계관적 환상과 부족적인 생존의 두려움과 편견과 상투적인 사고와 제한된 지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소위 신적 법률이란 우주적인 진리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부족만을 위한 이분법적이고 차별적이고 편협적인 것이기 때문에 온 인류에게 적용할 수 없으며 영원히 지속될 수도 없다.
교회기독교가 세계를 재패하고 통제하던 시대에 인격신론의 유신론적 하느님은 하늘 위 높은 자리에 앉은 재판장이었다. 기독교 신자들은 이 하느님이 인간의 모든 언행들을 상세하게 기록한 장부책을 들고 인간을 일시적으로 또는 영원히 징벌한다고 맹신했다. 또한 이 하느님이 기독교인의 윤리적인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 하느님의 죽음으로 인간의 윤리관과 가치관은 새로워지고 있다. 현대인들은 보편적으로 인식하기를 이 하느님 없이도 인간은 자율적으로 선할 수 있고, 창조적으로 온전해질 수 있다고 인식한다.
인류 역사에서 거의 모든 고대 민족들(부족들)의 민간전승에 따르면, 그 부족을 다스리는 율법들은 외부의 큰 힘이 계시했다는 이야기들이 포함되어 있다. 부족적인 율법들은 대부분이 꿈 속에서 또는 어떤 특별한 장소에서 초자연적인 신이 불러주는대로 받아 쓴 것으로 전해진다. 다시 말해 축자영감설 내지는 무오설을 첨부해서 율법을 절대화시켰다. 그 좋은 예가 기독교의 십계명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기독교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십계명의 경우에 현대인들이 순종할 가치가 없는 비상식적인 내용들이 들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십계명에 경의를 표하지만, 더 이상 고대에 지녔던 설득력과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말로만 십계명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지 못하거나, 그 가운데 어떤 계명은 절대로 순종하지 않는다. 사실상 십계명의 어떤 측면들은 21세기에 대단히 비윤리적이기 때문에 폐기해야 한다. 소위 성서에 기록된 소위 하느님의 법들은 종교와 인종의 경계 넘어 보편적으로 모든 인간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하느님의 뜻을 계시하기 위한 것도 아니며, 또한 그 법들은 시간과 장소를 넘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것들이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신자들 사이에는 통용이 될지 몰라도 교회 밖에서는 우수개 소리밖에 안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기독교 성서에 기록된 율법들은 하느님이 인간에 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서 겪은 체험들로부터 인간 스스로가 창작한 것들이며, 단지 그것들의 중요성을 부과하기 위해 하느님의 뜻이라고 강조했을 뿐이다.
참사람 예수는 인간의 생명은 완전히 자신의 독특한 존재가 되어야 하며 따라서 인간은 종교의 하느님 보다 더 소중하게 존중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예수는 이 진리를 막거나 방해하는 어떠한 종교와 정치체제라도 용납할 수 없었으며, 이 땅 위에 모든 생명이 존중되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자고 도전했다. 예수는 유신론적 성전종교가 생명을 업신여기는 윤리체계를 철저히 반대하고, 생명의 의미를 확장시키고 고양시키는 삶의 방식을 가르쳤다. 그는 생명을 탄압하고 착취하거나 인간의 존엄성을 억누르는 윤리관과 가치관을 거부했다.
하느님은 인간의 외부에 존재하는 객체적인 인격체가 아니라, 생명과 인간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서 드러나는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의 방식이다. 기독교인들이 성서를 신중하게 읽으면, 예수의 하느님은 유신론적 하느님이 아니라 무신론적인 의미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예수의 무신론적 하느님의 의미는 모든 개체들이 고양됨으로써 드러나는 온전한 개체이며, 모든 생명이 풍성한 삶으로써 드러나는 온전한 생명이며, 모든 사랑이 공평하게 공유되는 조건없는 사랑이며, 온갖 경계들이 무너지는 통합적이고 우주적인 공동체적 삶의 모습이다. 예수의 하느님은 믿을 필요도 없으며 다만 살아내면 된다. 동양에서도 사람이 하느님이고, 바람과 생기가 하느님이고, 밥이 하느님이라고 무신론적 하느님을 인식했다. 결국 예수의 하느님은 유신론적 존재론이 아니라, 무신론적 관계론이다.
무신론적 하느님의 윤리체계는 필수조건들에 대한 믿음으로 징벌을 면하고 축복을 받는 보상관계가 아니다. 영국의 급진적인 신학자 돈 큐핏은 자신의 저서 <태양 윤리(Solar Ethics)>에서 기독교인들의 윤리는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따라서 태양 윤리를 살아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태양이 살아가는 방식처럼 사는 것이다. 하느님을 포함해서 타자들로부터의 보상과 인정 등을 바라지 않고, 우리의 인간성을 따라 자율적으로 행하는 것이다. 태양이 스스로를 불태우고 자신을 내어주면서도 태양이듯이, 인간의 생애도 삶과 죽음에서 변함없이 자율적이고 창조적으로 인간이어야 한다.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따르는 기독교 윤리는 교리적 행위 통제체계에서 벗어나,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살아가는 생명의 풍성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교회는 만들어진 이분법적 교리들을 가지고 사람들을 차별적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자신들의 인간성의 깊이를 이해하도록 도와줌으로써 생명과 인간의 심층적인 의미를 이해하고, 세속적인 세상 속에서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삶을 실천적으로 살도록 격려해야 한다. 교회는 하느님의 유신론적 존재를 인간의 외부에서 찾는 것을 중단하고,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의 의미를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적으로 살아내야 한다. 하느님은 생명과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신론자 기독교인의 신학과 신앙이다.
21세기 과학시대에 하늘 위에 초자연적인 하느님은 윤리의 원천이 될 수 없다. 인류 역사에서 유신론적 윤리관은 생명을 업신여기고,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정죄하고, 인종차별과 성차별과 종교차별로 가정과 사회를 분리하고 절망과 혼돈에 빠트렸다. 유신론적 윤리는 죄악이다. 또한 유신론적 하느님은 선과 악의 기준이 될 수 없다. 하느님은 나의 잘잘못에 따라 상벌을 주는 아버지가 아니다. 하느님의 의미는 나의 책임감에 대한 요청, 나의 성숙함과 자율성에 대한 요청, 태양처럼 다른 사람들의 삶을 위해 나를 내어주라는 요청이다. 나의 삶의 중심에 있는 이 요청은 나의 연약함과 무의미함과 두려움과 공포와 이기심을 떠나 보낸다. 여기에서 윤리가 출현한다. 즉 내가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한, 태양처럼 다른 모든 생명들이 깊이 있게, 풍성하게, 충만하게 살도록 격려하고 도울 것이다. 이것이 21세기의 윤리적 원칙들이다. 나의 인생을 100% 책임지는 삶에는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다만 나의 인생을 잘 살았다는 것 자체가 보상이다. 나의 실패나 실수를 외부적인 하느님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와 하느님은 분리되지 않았으며, 나에게서 하느님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과거에 하느님의 뜻에 따라 윤리를 규정했던 유신론적 하느님은 죽었다. 오늘 우리는 <태양 윤리>와 같은 무신론적-인도주의 윤리가 절실히 필요하다.
[필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
<더 읽을 책>
*** (본 칼럼의 생각들은 이 책들에서 나왔다. 책 제목들을 통해 세계의 과학 철학 종교 사상에 대한 미래의 물결을
이해할 수 있다.) ***
리차드 루벤슈타인.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 한국기독교연구소, 2004
존 도미닉 크로산











특히 필자의 칼럼이 요즘 한인교회 진영에서 들어보기 힘든 휘귀한 이야기인듯 하지만 사실상 주류 신학계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보편적인 말들입니다. 그런데 이미 밝혔듯이, 한국 신자들은 100년 전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반도에 가져온 퇴행적 속물들을 아직고 움켜쥐고 있습니다. 이 속물들 (성서문자근본주의가 맹신하는 인격신론의 유신론적 창조론, 지적설계론, 유신진화론, 삼위일체론, 성령론, 구원론)은 이미 유럽은 물론 캐나다와 미국의 주류 신학계에서는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필자의 우주진화 세계관에 기초한 신학과 철학에 반대하는 독자들은 부족적이고 이분법적이고 차별적인 믿음을 넘어서 온 인류가 우주적이고 통합적으로 화합하여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대안에 대해서 현실적이고 상식적이고 구체적인 사상이 있으면 댓글에서 분노에 찬 폭력적인 말과 더불어 질문에 질문으로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기 보다는 자신의 대안을 따로 독립된 글로 올리는 것이 모든 독자들에게 유익할 것입니다. 댓글에서 자신의 생각을 소개할 때에도 사람을 표적으로 삼아 공격하지 말고, 문제점에 초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몇일 전 어느 독자가 나의 무신론적-인도주의적 역사적 예수의 정신에 따른 신학과 신앙에 대해서 “. . .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는 안하시는 것이 좋죠” 라는 몰상식한 말로 자신의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그 분의 이런 점잖치 못한 말버릇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서 그리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고, 그 “참사람 예수”를 설교와 교육에서 소개하고, 예수의 정신을 살아내자고 교인들에게 요청하고 격려한 나의 20년 전문목회 기간과 지난 7년 동안 CN드림에 이와 관련된 칼럼을 쓰는 동안 저를 향햔 분노와 폭력적인 말들을 들어왔습니다. 대개 그런 유신론자 보수 독자들은 성서문자근본주의 기독교인들입니다.
또한 저의 무신론적-인도주의적 기독교 신학 즉 진보적인 신학에 신경질적으로 분노를 터트리는 분들이 저를 향해 자주 사용하는 말들이 있는데 “이단” “사탄” “마귀” 심지어는 성서구절 “화 있을진저. . .”를 인용하면서 “하느님의 징벌”이 내릴 것이고, 죽은 후에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대단히 추악한 협박입니다. 이런 말들은 근본주의 기독교인들로부터 지난 20여년 동안 캐나다의 동쪽에서부터 서쪽까지 어디에서든지 많이 들어온 말들입니다. 오늘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런 험악한 말들을 듣는 것이 무섭거나 기분이 나쁘기 보다는,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따르는 기독교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은, 지금 여기에 무신론적- 인도주의적 세상을 건설하자고 선포한 “역사적 예수”를 거부하고, “만들어진 유신론적 예수,” “믿음의 대상이 되는 인격신론의 유신론적 하느님,” “이와 관련해서 내세적인 천국”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을 보호하려는 그 분들의 “종교문맹”입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상대방에게 그렇게 분노하고 입에 담을 수도 없는 험악한 말을 하는 것은 다른 종교인들과 무종교인들에게 부끄럽습니다.
예수는 기존의 유대교 성전신학 즉 인격신론의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존재를 믿도록 강요했던 유대교 성전의 신학을 철저히 반대하고, 우주적이고 통합적이고 무신론적인 하느님의 의미를 가르치고 자신이 몸소 살아냈습니다. 예수는 유신론적 종교를 넘어섰습니다. 제가 말하는 ”유신론적”이란 말의 뜻은 “하느님의 존재를 믿어야만하는”이고, “무신론적”이란 말의 뜻은 “교리적으로 믿어야만 하느님은 존재하지도 않고, 하느님이란 믿어야하는 객체적 대상이 아니라 자율적이고 창조적으로 살아내는 삶의 비전이고 방식”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 제가 이해하는 “유신론”은 믿어야만 하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의 신학”이고, “무신론”은 그런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 항상 변천하고 닥아오는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의미의 하느님을 살아내는 “삶의 신학”입니다.
지나간 나의 신앙의 여정을 되돌아 보면, 성서문자근본주의 유신론자 기독교인에서 시작하여 오늘 무신론적-인도주의자 기독교인에 이르렀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배우고 깨닫고 살아내게 되었던 나의 신앙의 여정은 이렇습니다:
나는 1988년에 멕길대학 공과대학에서 지질학 박사과정 중에 같은 대학의 종교학부로 전과하여 3년 동안의 목사안수를 위한 목회학 석사(M.Div)와 신학사(B.Th)를 취득했습니다. (몬트리얼에서는 3 교단(캐나다 장로회, 성공회, 캐나다연합교회)이 메길대학과 위탁교육의 자매결연을 맺고 있어서, 세 교단의 신학생들은 3년 동안 한 교실에서 신학과 목회를 공부합니다. 저는 원래 캐나다장로회 소속이었지만 공부하는 3년 동안에 저의 신학이 장로교회에서 더욱 진보적인 연합교회로 변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졸업 후에 연합교회 안수과정을 택하고, 몬트리얼/퀘벡 연회에서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앨버타의 그랜드케쉬(Grande Cache)연합교회에 파송되어 3년의 담임목회를 마치고 계속해서 칼스테어즈(Carstairs)연합교회의 청빙을 받아 7년간 목회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목회지로 토론토의 한인연합교회(We United Church)에서 5년을 목회한 후 2012년에 65세로 은퇴했습니다. 특히 목회 중에 "예수 세미나 학회"(Westar Institute)에 가입하여 역사적 예수 학자들과 교류하고, 그들의 출간서적들을 읽고 학회에 참석하여 그들과 대면토론을 갖는 것이 나의 진보적인 신학의 성장에 큰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또한 앨버타 대학의 St.Stephen's College(캐나다연한교회 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D.Min) 과정을 수료하는 3년 동안 심층적인 신학연구는 나의 역사적 예수 목회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1988년 캐나다연합교회와 인연을 맺고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를 하는 동안 교단의 총회와 연회의 상임위원회들과 노회장(레드디어 노회)을 거치면서 연합교회 신학과 신앙에 대한 정책들을 수립하는 데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여러 도시들과 연회들과 노회들을 거치면서 많은 동역자들을 만나고 자신들의 신학을 솔직하게 나누며 공유하는 귀한 경험을 가졌습니다. 연합교회에는 나와 동일하게 역사적 예수의 정신과 신학을 목회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을 전국적으로 만나면서 나는 홀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연합교회는 1세기 전에 탄생할 때부터 급진적인 교회였습니다. 내가 오늘의 신학과 신앙으로 성숙해질 수 있었던 것은 다른 교단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성서문자근본주의의 실상과 그 모순을 역사적 예수를 통해서 인식할 수 있었던 것도 연합교회가 속한 메길대학 종교학부에서 신학을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잊지 못할 나의 마지막 수업이었던 신학자 더글라스 홀 교수의 강의였습니다. 그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저술가였습니다. 그는 연합교회 교인이었으며, 학생들에게 신신당부하기를 “여러분의 신학이 연합교회를 넘어서기 바랍니다.” 또한가지 잊지 못할 것은 더글라스 교수는 자신의 강의시간에 한국의 “민중신학”(참사람 예수의 삶의 신학)을 소개해 달라고 해서 발표를 하고 교수님과 학생들의 질문들에 답변하고 토론했던 기억이 납니다.
신학교를 졸업한지 30년이 지났습니다. 현재 나의 신학은 공부할 때와 목회할 때와 은튀한 후 오늘까지 끊임없이 발전하고 심층적으로 성장했습니다. 나의 스승 더글라스 홀 교수의 요청대로 나의 신학은 이미 캐나다연합교회를 넘어섰습니다. 나 뿐만 아니라 나의 동창생들과 후배들과 동역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캐나다연합교회는 1980년대 초부터 성서문자근본주의 추방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성서의 절대적인 권위를 부정하고, 예수의 신성을 부인했습니다. 따라서 1988년에 동성애자 목사안수를 선포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연합교회의 신학과 신앙은 제자리에 머물러 서있던 때가 없었습니다. 연합교회는 과거의 패러다임에 정체되지 않는 교회입니다. 연합교회는 저와같은 무신론자 목사를 교댠에서 제명하거나 추방하기 보다는 저의 신학과 신앙을 존중합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무신론적-인도주의적인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것만이 교회를 다시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교회를 다시 살리려면 과거와 현재의 교회를 넘어서야 합니다. 얼마전에 어느 독자께서 앞으로 50년, 100년, 300년 후에 교회가 어떤 모습이 될지, 종교가 어떤 형식이 될지 아무도 예상하거나 확실히 알 수도 없이, 세상은 급속도로 변화되어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오랫동안 소중하게 간직해왔던 인격신론의 유신론적 믿음을 버리기 아까워서 움켜쥐고 있기 보다는 담대하게 아낌없이 떠나보내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