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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 도는 역사의 수레바퀴 - 홍삼을 통해 보는 조선 말 개화기 모습 _ 오충근의 기자수첩
 
19세기 말 20세기 초는 혼돈의 시대요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열강들에게 조선은 좋은 먹이였다. 뜻 있는 사람들은 조선을 개혁해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했으나 친미파, 친러파, 친일파, 친청파로 갈라진 조정은 외세를 이용해 개혁을 모색했으나 허상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입으로는 자주독립을 말하면서 외세에 의존하려는 정치세력들이 있어 사회를 분열시키고 나라를 좀먹고 있다.
이건창 정원하 홍승원, 황현 등 보수파는 외세 보다는 내적쇄신으로 기울어 가는 국운을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동학혁명을 끝으로 조선은 자력갱생의 길을 완전히 잃었고 조선의 운명은 시간 문제였다.
*황현은 관직생활을 하지 않았으나 재야지식인으로 조선말기 사회에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동학혁명 10년전 친일 개화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정변의 주역들이 우정국 낙성식에 초대한 수구파 대신들을 제압하고 고종을 설득해 급진적개혁을 계획했으나 정변은 3일만에 실패로 끝나고 정변의 주역들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고종, 민영익과 홍삼
우정국 낙성식에 참가했던 민영익은 서재필이 지휘하는 암살단의 공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으나 선교사 겸 의사인 알렌이 수술하여 겨우 목숨을 건졌다.
민비의 조카뻘 되는 친척인 민영익은 갑신정변 당시 민영익은 24세 청년으로 친군우영사(수도 방위 사령관)였다. 소년 시절은 가난하게 살았으나 민비 덕에 크게 출세해 18세에 성균관 대사성(국립대학 총장)을 지냈고 23세에 전권대사가 되어 수행원을 거느리고 미국을 예방했다. 가난하게 살던 민씨들은 민비 덕에 모두 고관대작이 되어 권세를 휘두르고 부정축재로 재산을 모아 거부가 되었다.
민씨 중에서 제법 똑똑했던 민영익은 개혁을 통해 조선이 부국강병을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어 모호한 태도를 취하다 결국 친청 수구파로 전향했다.
윤치호 일기에도 민영익이 박영효, 김옥균, 홍영식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유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정부는 점점 심해지는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친 러시아 정책을 세웠다. 친 러시아 정책은 원세개의 정보망에 걸렸다. 원세개는 고종을 퇴위 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는 고종 퇴위에 민영익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으나 민영익은 오히려 정보를 빼내어 조정에 알렸다. 그후 민영익은 정치적 위협을 느껴 러시아 군함을 타고 망명길에 나섰다.
조선은 민영익을 보호할 힘조차 없었단 말인가? 그는 천진으로 몸을 피했다 다시 상해를 거쳐 홍콩으로 망명했다. 고종은 민영익에게 홍삼 전매권을 주었다. 고종이 왜 민영익에게 홍삼 전매권을 주었는지 모른다. 단순한 사욕일까?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할 요량이었을까?

아무도 모른다.
민영익은 천진에서 프랑스 영사관 대표 드 브조르를 만나 소개장을 얻은 후 상해로 향했다. 상해 프랑스 계 할인은행 부이몽 지점장을 만나 34,736 타엘(약 203,600 프랑)을 예치하고 그 금액에 해당하는 신용장 발급받았다. 그때가 1885년 11월18일이다.
상해에서 민영익은 윤치호도 만났다. 두 사람은 개화파 인물들과 친해 잘 아는 사이다. 윤치호는 15세 때 신사유람단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서 1년 동안 머물며 영어를 배워 푸트 공사의 통역이 되어 귀국했다.
그는 갑신정변에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개화파들과 친분이 두터웠고 윤치호 아버지 윤웅렬도 개화파들과 가깝게 지내 의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미국 공사의 통역 윤치호는 고종 내외의 신임을 얻었으나 갑신정변 협력자라는 주위의 따가운 눈총을 견디지 못하고 상해로 망명해 중서서원에 입학해 근대교육을 받았다. 그때 윤치호 나이 20세였다.
윤치호 일기에 따르면 민주호, 윤정식은 윤치호와 함께 중서서원에서 공부를 했다. 윤정식은 지금으로 치면 영재교육 기관인 동학당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웠다.
동학당 졸업생들은 병원, 전신국, 세관 등 정부 기관에 고용되어 일을 했다. 윤정식과 민주호는 거의 매일 윤치호와 어울렸다. 등록금 납부할 돈이 없어 윤치호가 빌려준 적도 있다.
낯 선 외국에서 형제처럼 지내던 민주호 윤정식은 윤치호에게 말 한마디 없이 민영익을 따라 홍콩으로 떠났다.
윤치호는 그날의 섭섭한 감정을 일기에 가감 없이 썼다. “운미(민영익)가 작별인사 없이 떠난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민주호 윤정식이 그간 쌓아온 정도 있는데 말한마디 없이 떠났다니 서운하다. 등록금 빌려준 돈 달라고 할까 봐 그랬을까?”

민영익과 HSBC(홍콩 상하이 은행)
홍콩에서 민영익은 호화생활을 했다. 최고급 호텔에 머무르며 홍삼 거래를 통해 큰 돈을 벌었다. 그러나 그 돈은 민영익 개인 돈이 아니라 고종의 내탕금이었다. 죽을 고비에 처한 민영익을 수술해 살려준 알렌도 홍콩에 왔다 민영익에게 절약할 것을 충고할 정도였다.
민영익은 고종에게 위탁 받은 홍삼 만 근을 팔아 HSBC에 보관했다. 지금 몇 천억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었다. 그후 귀국하였던 민영익은 을사늑약 때 다시 홍콩으로 망명했다
1914년 상해에서 생을 마감했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총살하고 일본 경찰에 잡혔을 때 민영익은 거금 4만원을 주고 프랑스, 러시아 변호사를 고용해 안중근 의사 구명 운동을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유언도 없이 죽어 HSBC에 보관한 홍삼 판매대금 수천억의 행방은 묘연했다. 홍삼 대금이 다시 알려진 것은 상해 임시정부 때였다. 1922년 임시정부는 혹독한 재정난을 겪었다. 건물 임대료가 밀려 고소를 당할 지경이었다.
임시정부 사정을 들은 조선일보 편집국장 김병혁과 민씨 일가인 민병길은 임시정부를 도울 생각에 민영익의 아들 민정식을 찾아갔다. 민영익이 중국여인과 살 때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민정식이다. 민정식의 모친인 중국여인이 열쇠를 갖고 있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비밀리에 열쇠의 출처를 조사했다. 열쇠는 HSBC 개인 보관함 열쇠였다. 임시정부 관계자와 민정식은 상해 HSBC를 방문해 민영익 개인 보관함을 열었다.
금은보화나 막대한 현금을 기대했으나 보관함에서 나온 것은 소송 서류 몇 장이었다. 실망한 일행은 지점장에게 따졌다. 지점장은 홍콩 본점을 찾아가 보라고 권했다.
일행은 홍콩으로 달려갔다. 본점 금고에도 민영익 개인 보관함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보관함에서는 서류 몇 장만 나왔다. 그렇게 해서 일년을 끌던 홍삼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HSBC 내막을 잘 아는 중국인의 술회: 청조 말기 황족들이나 부자들은 난세에 혁명군(국민당이나 공산당)에게 언제 재산을 몰수당할지 몰라 외국계 은행에 보관했다.
그러나 난리를 겪으며 죽은 사람들도 많고 멀리 피신해 홍콩이나 상해까지 와서 재산을 찾을 엄두를 내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소자본으로 설립된 HSBC은 그때쯤 갑자기 사세가 확장되었다.

윤정식과 민주호
홍콩에서 윤정식과 민주호는 민영익의 수행원처럼 행동했다. 12월27일 민주호와 윤정식이 파리 할인은행 홍콩지점에 나타났다. 아무도 두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액면10,000 타엘(58,600프랑, 미화 17000달러) 신용장을 보여주며 현금을 요구했다. 은행 직원은 현금을 준비한 후 영수증에 서명 날인할 것을 요구했다.
도장은 신용장에 찍힌 도장과 동일해야 했다. 자신을 민이라고 소개한 청년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도장을 안 갖고 왔다.”면서 내일 오겠다고 말하고 은행을 나섰다.
다음날 두 사람은 도장을 갖고 나타나 영수증에 서명 날인하고 현금을 확인하고 은행을 나섰다. 그 후 두 사람은 기선을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민영익은 2주가 지나서 은행에 나타나 10,000타엘이 없어진 사실을 알았다. 그는 은행으로부터 전후 사정을 다 듣고도 두 사람이 사라진 것을 걱정하지도 놀라지도 않았고 그들이 돈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서류를 위조해 돈을 찾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2주 후라면 두 사람이 도망하고도 충분히 남을 시간이었다. 그래서 은행에서는 민영익이 공범이 아닐까 라는 의심도 했다.
민영익은 없어진 10,000타엘이 은행 책임이라고 주장했고 은행에서는 한번 지급한 금액을 다시 지급할 수 없다고 맞섰다. 이 사건은 소송이 걸려 법정에 갔다. 법정에서는 민영익의 손을 들어주었다.
일본으로 간 윤정식 민주호는 김옥균을 찾아가 장래를 의논했다. 그러나 망명객 김옥균은 제 한 몸도 건사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두 사람은 김옥균에게 생활비로4천 달러를 주었다. 김옥균은 같은 개화파 인사인 변수를 두 사람에게 소개했다. 1886년 1월24일 변수는 두 사람을 데리고 미국 행 배에 올랐다.
세 사람 모두 조선의 죄인이다. 변수는 갑신정변에 연루된 대역죄인이고 민주호 윤정식은 사기 절도범이다. 1887년 9월 민주호와 변수는 메릴랜드 농과대학에 입학했다. 조선정부는 이들의 송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범인인도협정도 없었고 “이 사람들이 비록 죄인이지만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면 조, 미 통상업무에 도움이 되고 조선 근대화에도 이바지할 것”이라고 거부했다.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은 민주호에게 “너는 당시 14세 미성년이라 무죄”라면서 귀국을 권했다. 1888년 민주호는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해 빚을 갚고 이름도 민상호로 바꿨다. 한일합방 후 남작 작위를 받은 걸로 보아 친일파로 살았으리라 추정된다. 윤정식도 귀국해 옥살이 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 후 행적을 찾을 수 없다.
홀로 남은 변수는 학업을 마치고 미국 시민권을 취득 후 농무부에 취직했다. 그러나 취직 3개월만에 통근열차에 치어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 겨우 30세였다.
조선 말 개화기의 청년들의 삶이 고달프고 어렵고 절망스러웠으나 조선의 근대화, 부국강병의 꿈을 안고 각자의 위치에서 노력했다. 일부는 소시민으로, 일부는 친일로, 일부는 항일 독립운동으로 제각기 다른 길을 걸었지만.


기사 등록일: 202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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