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안내   종이신문보기   업소록   로그인 | 회원가입 | 아이디/비밀번호찾기
기자수첩) 굿바이 미스터 앨버타(1928.7.26-2012.9.13)
이메일 온 것을 알리는 신호음이 울린다. “뭘까?” 교육청에서 온 이메일은앨버타 전 지역 학교 및 관공서가 피터로히드(Peter Lougheed) 전 수상의 서거에 조의를 표하며 장례식 끝날 때까지 조기를 게양하기로 했다는 내용이다.
그가캘거리에 있는 자신의 이름을 딴 병원에서 영면을 취한지 16시간만에 결정된 내용이다. 몇 달 병원에 입원했다 지난 목요일(13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 피터로히드는 그런 예우 받기에 충분한 사람이다.
앨버타는 그의 별세에 대해 조기게양뿐 아니라 주 의회 원형 회의장에 시신을 이틀 동안 봉안 하는 예우를 더해 앨버타를 위해 헌신하고 노력한 전임 수상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의사당에 시신 봉안을 위해 그는 영구차를 타고 에드몬톤에 도착해 의사당 계단에서 주 의회 부의장 죠지로저스의 영접을 받으며 레드카페트를 밟으며 회의장에 들어 섰다. 조문객들은 이틀 간 의사당에서 직접 조문할 수 있다.
이민 온지 오래된 분들은 피터로히드 주 수상(1971년-1985년)을 기억할 것이다. 1935년 이래 36년 집권해온 사회신용당(Social Credit Party)을 1971년 선거에서 이겨 집권에 성공, 현 집권당인 PC(Progressive Conservative) 40년 집권의 초석을 놓은 정치인으로 레드토리(red tory)라는 정파나 이념을 초월해 앨버타는 물론 캐나다 전역에서 존경 받는 몇 안 되는 정치인이다.
피터로히드는 1928년 7월26일 캘거리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에드몬톤에 있는 앨버타 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두 시즌을 에드몬톤 에스키모에서 football 선수로 뛰기도 했다. 등 번호 30을 달고. 원래 로히드 가문은 정치가 집안으로 할아버지 제임스로히드는 연방정부에서 상원의원과 장관을 지냈다.
정치가 집안 출신답게 자연스럽게 정계에 들어온 피터로히드는 1965년 PC 전당대회에서 당수로 선출되어 정치를 시작했고 1967년 선거에서 캘거리웨스트에서 당선, 주 의원이 되었다.
피터로히드 주 수상이 앨버타에서 전설적인 인물이 된 것은 연방정부로부터 앨버타 천연자원을 지켜낸 것과 오일 붐에 힘입어 HSTF(Heritage Saving Trust Fund)를 설립해 헬스 캐어, 교육 등 앨버타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이바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76년 설립된 HSTF는 340억불이 앨버타 헬스 캐어와 교육에 쓰여졌고 2012년 6월 말 기준으로160억불 잔고가 남아 있다. 그 외 피터로히드는 문화, 예술 스포츠 진작에도 힘을 썼다. 에드몬톤 거리축제인 the fringe festival이 시작된 것도 이때로 앨버타가 사회신용당 시절의 투박한 촌티를 벗고 세련미를 갖추고 차츰 도시화 하기 시작했다. 요즘 이민 온 분들에게는 앨버타가 여전히 촌스럽고 세련되지 못한 곳이겠지만.
피터로히드는 1971년 11월 앨버타 주 수상에 취임 일성으로 “연방정부 에너지 정책에 대해 더 많은 말을 해야 한다고 선언해 연방정부와 에너지 정책을 놓고 일전불사를 예고했다. 그는 원유회사들이 주 정부에 지불하는 로열티를 50% 가까이 올려 주 재정을 튼실하게 하고 앨버타 재정이 자원에만 의지하는 것에서 벗어나 다양한 수입원을 추구 했다.
피터로히드는 주 수상 재임 시절 앨버타 천연자원을 손아귀에 넣고 통제하려는 연방정부에 맞서서 격렬한 투쟁을 했다. 유류파동을 거치며 오일붐이 일어 유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자 연방정부는 앨버타 원유의 캐나다 유통가격을 국제시세 이하로 낮출 것과 로열티 일부를 요구했다.
피터로히드는 연방정부의 일련의 조치를 전쟁으로 간주하고 연방정부가 앨버타 안방을 차지하려는 위협에 원유 감산으로 맞섰다. 연방정부가 양보하며 물러섰다. 연방정부는 앨버타 원유 가격을 인상하고 앨버타 천연자원은 앨버타 소유임을 재확인했다. 연방정부에 맞선 로히드 주 수상의 승리였다.
피터로히드는앨버타 주민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1971년 총선에서 “Now” 라는 한 마디로 36년 집권의 사회신용당을 이겨 주 수상에 취임한 그는 75년 총선에서는 75석 중 69석을, 79년 총선에서는 79석 중 74석을, 82년 총선에서는 79석 중 75석을 차지하는 등 압도적 차이로 야당을 누르며 PC왕국 위치를 공고하게 했다.
피터로히드가 위대하다는 것은 때가 되자 미련 없이 정계를 떠난 것에서 알 수 있다. 1984년 주 수상을 사임한 그는 이듬 해인 1985년 의원직도 사임했다.
그는앨버타의 경제, 문화, 예술뿐 아니라 앨버타 권리장전(Alberta Bill of Right)을 제정해 앨버타 민주주의 정착에도 공헌한 훌륭한 정치인이었으나 “나 아니면 안된다”는 아집과 착각의 포로가 되지 않고 물러날 때가 되자 오랫동안 같이 내각에서 일했던 Don Getty에게 물려주고 은퇴했다.
피터로히드의 진가는 그가 정계에서 은퇴한지 27년만인 지난 4월 총선에서 나타났다. 40년 집권의 PC왕조에 도전장을 내민 것은 blue tory의 와일드로즈 당이었다. 40년 집권의 PC에 주민들이 염증이 난 것일까? 총선에서 새로운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PC의 위기였다. 이때 피터로히드가 나서 4월 총선에서 패색 짙은 앨리슨레드포드를 공개지지하며 위기에 빠진 당을 구했다.
돌풍을 일으킨 신예 와일드로즈는 초반부터 기세를 떨치며 앞서 나갔다. 앨리슨레드포드의 PC는 와일드로즈의 초반 강공을 견디지 못하고 물러섰다. 많은 사람들이 PC 40년 아성이 무너진다고 생각했다.
와일드로즈가 초반 승세를 이어 가지 못하고 패한 것은 앨런헌스퍼거 같은 내, 외야수들의 어이없는 삽질로 자멸하기도 했지만 당이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한 피터로히드는 정계은퇴한지 27년만에 구원투수를 자청, 투 아웃 만루의 위기상황에서 와일드로즈 강타자 다니엘스미스를 상대로 강속구를 구사해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역전승으로 패색이 짙은 당을 구해냈다.
지난 4월 총선 결과를 보면 앨리슨레드포드 주 수상은 피터로히드에게 정치적 빚을 단단히 진 것이다.
연방정부를 상대로 끈질긴 투쟁을 벌린 피터로히드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가 주 수상 재임시 성탄 시즌에 주민들이 의사당에 와서 캐롤을 부르자 집무실에서 나와 주민들과 합류 같이 캐롤을 부른 것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주 수상에서 사임하고 초야로 돌아간 피터로히드를 기려 앨버타는카나나스키스 지역의 주립공원을 피터로히드 주립공원으로 명명하고 그의 출생지이자 정치적 고향 캘거리의 종합병원을 피터로히드 센터로 명명했다. 이번에 그가 세상 떠난 것을 기려 캘거리 공항을 피터로히드 공항으로 명명하자는 제안이 있다.
장례식이 끝나면 조기는 원 위치로 돌아 갈 것이다. 장례식에 참석했던 사람들, PC 주 의회 의원들, 그와 함께 정치를 논하던 사람들 기억에서 그는 차츰 잊혀질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제정한 앨버타 권리장전, Heritage saving fund는 앨버타 주민들의 삶을 지켜 줄 것이다.

기사 등록일: 2012-09-21
나도 한마디
 
최근 인기기사
  캐나다 소득세법 개정… 고소득자..
  로또 사기로 6명 기소 - 앨버.. +4
  웨스트젯 캘거리 직항 대한항공서..
  성매매 혐의로 억울한 옥살이 한..
  캘거리 의사, 허위 청구서로 2.. +1
  버스타고 밴프 가자 - 레이크 .. +5
  주정부, 전기요금 개편안 발표..
  캘거리 고급주택 진입 가격 10..
  미 달러 강세로 원화 환율 7%..
  해외근로자, 내년부터 고용주 바..
댓글 달린 뉴스
  버스타고 밴프 가자 - 레이크 .. +5
  캘거리 초미의 관심사, 존 Zo.. +1
  캘거리 존 Zone 개편 공청회.. +1
  오일러스 플레이오프 진출에 비즈.. +1
  로또 사기로 6명 기소 - 앨버.. +4
  캘거리 의사, 허위 청구서로 2.. +1
회사소개 | 광고 문의 | 독자투고/제보 | 서비스약관 | 고객센터 | 공지사항 | 연락처 | 회원탈퇴
ⓒ 2015 CNDrea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