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골수 좌파는 세상을 흑백으로 본다.
아니, 본다기보다 믿는다.
흑백은 관점이 아니라 신앙이고, 신앙에는 의심이 금지다.
흰색은 무조건 우리 편, 검은색은 무조건 적.
회색을 꺼내는 순간 대화는 종료된다.
그 단어가 등장한다. “프레임.”
프레임이 나오면 생각은 필요 없다. 찍고 끝이다.
정보 섭취는 더 효율적이다.
레거시 언론 1면은 요한계시록 할렐루야 아멘이며 나머지는 전부 사이비 이단.
거리에서 20 30대가 반민주당 반이재명 반중국을 외쳐도
카메라에 안 잡히면 현실 미존재 판정.
보이지 않으면 없고, 없으면 설명도 없다.
현실은 카메라 밖에서 증식하지만,
그들의 세계는 편집본만 자동 재생된다.
리모컨은 필요 없다. 채널은 하나니까.
분노는 정확하다. 늘.
단, 방향만 틀린 채로.
상대의 티끌은 구조적 악이 되고,
우리 편의 구조적 악은 “사소한 실수”로 축소된다.
비판은 혐오, 검증은 탄압, 풍자는 폭력.
웃음은 금지되고 분노만 합법이다.
분노는 결속을 만들고, 결속은 면죄부를 대량 인쇄한다.
도덕은 선별 배송, 원칙은 무조건 조건부 적용.
청년을 대하는 장면에선 블랙코미디가 완성된다.
좌파는 청년을 사랑한다. 문장 속에서만.
청년이 거리로 나오면 곧바로 “선동됐다.”
중국을 말하면 “외교를 모른다.”
자유를 말하면 “시장 만능주의에 세뇌됐다.”
찬성하면 ‘청년’, 반대하면 ‘미성숙한 군중’.
그래서 청년은 늘 사진 속에만 있다.
현실에 나오면 설정이 깨지기 때문이다.
언론은 이 세계관의 성가대다.
음정은 하나, 다른 소리는 잡음 처리.
보도하지 않음으로써 세상은 정리된다.
보도가 되면 존재, 미보도인 경우는 환상.
현실은 편집실에서 패배하고,
좌파는 이것을 언론 자유라 부르며 안심한다.
시청자는 그 안심을 안정이라 착각한다.
여기에 결정적 장치가 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특히 자기 확신이 굳을수록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경고다.
이 말은 흔히 유시민 왈 “ 60살 넘어가면 뇌가 썩는다”로 요약되지만,
정확히 썩는 건 뇌가 아니라 태도다.
질문을 멈춘 순간, 사고는 보존이 아니라 퇴행으로 간다.
그런데 이 경고는 늘 남 얘기로만 쓰인다.
자기 점검은 삭제되고, 상대 재단만 남는다.
그래서 새로운 사실은 문 앞에서 돌아서고,
익숙한 해설만 방 안을 채운다.
확신의 볼륨은 풀로 올리고,
정보의 출입구는 잠금.
이쯤 되면 나이는 핑계다.
노화는 자연, 경직은 선택.
그리고 이 모든 불안을 잠재우는 안심 버튼이 있다.
그 버튼의 이름은 리짜이밍이다.
라벨을 붙여준다.
“이건 정의.”
라벨이 붙는 순간 냄새는 사라진다.
생각할 필요도, 질문할 필요도 없다.
현실이 아무리 변해도
재생 버튼은 늘 같은 화면을 틀어주니까.
결론은 이렇다.
흑백 논리에 취하면 똥과 된장을 구분하지 못한다.
냄새를 맡지 않고,
라벨만 믿기 때문이다.
마지막 경고 하나.
현실은 편집되지 않는다.
카메라 밖에서 자라는 불만은
언젠가 화면을 찢고 들어온다.
그때도 그들은 말할 것이다.
“우리는 몰랐다.”
하지만 다 안다.
몰랐던 게 아니라, 묻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또 한 번,
책임은 추후 지정된다
P.S ‘요설’이라는 말은 반박의 대체어다.
내용으로는 이길 수 없을 때, 질문 자체를 무효화하기 위해 붙이는 딱지다.
논리가 있으면 반박하면 된다.
근거가 있으면 깨면 된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니 “요설”로 토론을 종료한다.
그래서 ‘요설’이 먼저 나온 순간은 곧 백기다.
답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신호다.
그러니 요설을 부르는 사람은 후달려서 이미 논쟁에서 내려왔다.







• 좌파의 문제로 지적된 도식적 사고, 진영 논리, 도덕적 우월감은
이미 우파도 동일한 상황이 되어버렸으며 한국 정치 전반의 구조적 병폐가 되어 버렸어요.
• 오늘의 한국 사회는 좌·우를 막론하고 “내 편은 선, 상대는 악”이라는 감정 정치에 갇혀 있구요
• 그 결과 정책의 내용, 사실관계, 책임의 크기는 사라지고 편 가르기와 혐오만 증폭되고 있어요.
• 이념 논쟁이 현실 문제 해결을 압도하는 순간, 정치도 시민도 함께 퇴행하는데 세월호 사태, 천안함 사태등이 모두 이렇게 이념 논쟁으로 되어 버린것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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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골수 좌파는 세상을 흑백으로 본다.
아니, 본다기보다 믿는다.
흑백은 관점이 아니라 신앙이고, 신앙에는 의심이 금지다.
흰색은 무조건 우리 편, 검은색은 무조건 적.
회색을 꺼내는 순간 대화는 종료된다.
그 단어가 등장한다. “프레임.”
프레임이 나오면 생각은 필요 없다. 찍고 끝이다.
정보 섭취는 더 효율적이다.
레거시 언론 1면은 요한계시록 할렐루야 아멘이며 나머지는 전부 사이비 이단.
거리에서 20 30대가 반민주당 반이재명 반중국을 외쳐도
카메라에 안 잡히면 현실 미존재 판정.
보이지 않으면 없고, 없으면 설명도 없다.
현실은 카메라 밖에서 증식하지만,
그들의 세계는 편집본만 자동 재생된다.
리모컨은 필요 없다. 채널은 하나니까.
분노는 정확하다. 늘.
단, 방향만 틀린 채로.
상대의 티끌은 구조적 악이 되고,
우리 편의 구조적 악은 “사소한 실수”로 축소된다.
비판은 혐오, 검증은 탄압, 풍자는 폭력.
웃음은 금지되고 분노만 합법이다.
분노는 결속을 만들고, 결속은 면죄부를 대량 인쇄한다.
도덕은 선별 배송, 원칙은 무조건 조건부 적용.
청년을 대하는 장면에선 블랙코미디가 완성된다.
좌파는 청년을 사랑한다. 문장 속에서만.
청년이 거리로 나오면 곧바로 “선동됐다.”
중국을 말하면 “외교를 모른다.”
자유를 말하면 “시장 만능주의에 세뇌됐다.”
찬성하면 ‘청년’, 반대하면 ‘미성숙한 군중’.
그래서 청년은 늘 사진 속에만 있다.
현실에 나오면 설정이 깨지기 때문이다.
언론은 이 세계관의 성가대다.
음정은 하나, 다른 소리는 잡음 처리.
보도하지 않음으로써 세상은 정리된다.
보도가 되면 존재, 미보도인 경우는 환상.
현실은 편집실에서 패배하고,
좌파는 이것을 언론 자유라 부르며 안심한다.
시청자는 그 안심을 안정이라 착각한다.
여기에 결정적 장치가 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특히 자기 확신이 굳을수록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경고다.
이 말은 흔히 유시민 왈 “ 60살 넘어가면 뇌가 썩는다”로 요약되지만,
정확히 썩는 건 뇌가 아니라 태도다.
질문을 멈춘 순간, 사고는 보존이 아니라 퇴행으로 간다.
그런데 이 경고는 늘 남 얘기로만 쓰인다.
자기 점검은 삭제되고, 상대 재단만 남는다.
그래서 새로운 사실은 문 앞에서 돌아서고,
익숙한 해설만 방 안을 채운다.
확신의 볼륨은 풀로 올리고,
정보의 출입구는 잠금.
이쯤 되면 나이는 핑계다.
노화는 자연, 경직은 선택.
그리고 이 모든 불안을 잠재우는 안심 버튼이 있다.
그 버튼의 이름은 리짜이밍이다.
라벨을 붙여준다.
“이건 정의.”
라벨이 붙는 순간 냄새는 사라진다.
생각할 필요도, 질문할 필요도 없다.
현실이 아무리 변해도
재생 버튼은 늘 같은 화면을 틀어주니까.
결론은 이렇다.
흑백 논리에 취하면 똥과 된장을 구분하지 못한다.
냄새를 맡지 않고,
라벨만 믿기 때문이다.
마지막 경고 하나.
현실은 편집되지 않는다.
카메라 밖에서 자라는 불만은
언젠가 화면을 찢고 들어온다.
그때도 그들은 말할 것이다.
“우리는 몰랐다.”
하지만 다 안다.
몰랐던 게 아니라, 묻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또 한 번,
책임은 추후 지정된다
P.S ‘요설’이라는 말은 반박의 대체어다.
내용으로는 이길 수 없을 때, 질문 자체를 무효화하기 위해 붙이는 딱지다.
논리가 있으면 반박하면 된다.
근거가 있으면 깨면 된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니 “요설”로 토론을 종료한다.
그래서 ‘요설’이 먼저 나온 순간은 곧 백기다.
답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신호다.
그러니 요설을 부르는 사람은 후달려서 이미 논쟁에서 내려왔다.